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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시장은 정의로운가' 불공정·불공평한 시장에 일침…시장만능 맹신 주류경제학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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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시장은 정의로운가' 불공정·불공평한 시장에 일침…시장만능 맹신 주류경제학 비판

입력
2012.03.0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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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정의로운가/이정전 지음/김영사 발행ㆍ324쪽ㆍ1만4000원

버스를 타려고 길게 줄 서 있는데 어떤 사람이 슬쩍 새치기 해서 들어왔다. 줄 섰던 사람들 대부분은 당연히 화를 낸다.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뭐라고 할까? 화 내지 말고 흥정하라고 주문한다. 새치기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뒤에 있던 사람이 얼른 그 사람과 흥정해서 돈을 받고 자리를 양보하면 서로 이익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을 지낸 경제학자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간 <시장은 정의로운가> 에서 '이렇게 흥정하는 것이 곧 시장의 원리에 따르는 길이라고 경제학 교과서에 적혀 있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경제학과 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저술이나 칼럼, 논평 등 대중적인 글쓰기를 활발하게 해왔다. 이번 책도 <시장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우리는 행복한가> <경제학을 리콜하라> 같은 이전 저술의 연장선에 있다.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 중 하나인 '공정'에 대한 경제학적인 사색이자 '시장 만능'이라는 맹신을 부추기는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다.

수요와 공급을 통한 합리적인 가격 결정, 경쟁을 통한 정확한 보상ㆍ처벌 시스템 등 주류경제학이 시장에 보내는 찬사들은 실제 현실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교과서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이 교수는 지적한다.

예를 들어 시장이 명백한 책임 추궁을 통해 보상ㆍ처벌한다는 주장은 '잘 해야 교과서에서나 통할'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한국의 외환위기 때 파산 지경인 기업의 고위 간부가 부도를 막자는 공적 자금을 빼돌려 사익을 챙긴 사례가 있었고 최근 금융 위기 때도 위기의 주범이라고 해야 할 월가의 투자은행 인사들은 두둑한 보너스를 받았다. 시장의 상벌 기능이 그만큼 흐리멍덩하다는 말이다.

설사 제대로 상벌을 준다고 해도 시장처럼 돈으로 할 경우 올바른 상벌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아이를 맡기고 늦게 찾으러 오는 부모를 줄이기 위해 벌금을 매긴 유아원의 사례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벌금을 내는 것으로, 약속을 어겨 보육사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도덕적인 부담감을 덜게 되자 늦게 오는 부모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아차 싶어 유아원은 벌금을 없앴지만 이미 심리적 부담이 줄어든 부모들의 숫자는 더 줄지 않았다.

<정의론> 으로 유명한 존 롤스의 잣대를 들이대면 시장은 정말 무법천지에 가깝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롤스는 자유경쟁시장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우연적인 요인에 의해 소득이나 부의 분배가 너무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꼽았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모 덕에 호강하고 좋은 학교 나와 출세하고, 물려 받은 부동산이 또 올라(한국은 최근 30년 동안 부동산 가격이 12배 뛰었다고 한다) 더 큰 부자가 되는 시스템은 전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리카도와 달리, 자본주의가 성장 정체기를 맞을 때야말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무엇이 행복인지를 돌아볼 중요한 시기라고 지적한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 같은 학자들을 소개하며 보수 경제학을 조목조목 꼬집는 대목들도 흥미롭다.

저자가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인(仁)'이 없고 '이(利)'만 있는 시장 지배의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대변하는 일화가 있다. 전설적인 뉴욕시장 라가디아가 즉결심판소에서 내린 판결 이야기다. 손자들이 배 고파 우는 모습을 보다 못해 50센트짜리 빵 한 덩이를 훔친 노인이 잡혀 왔다. 사정은 딱했지만 빵집 주인은 그를 범죄자라며 처벌해달라고 한다. 라가디아 시장은 법을 어긴 것은 어쩔 수 없으므로 그에게 벌금 10달러를 선고했다. 이어서 노인이 빵을 훔치게 될 때까지 그를 돕지 않은 책임으로 자신에게도 10달러를, 그 자리에 선 다른 사람들에게도 50센트의 벌금을 선고했다. 라가디아 시장은 거둔 돈을 노인에게 주었고 노인은 그 중 10달러를 벌금으로 낸 뒤 나머지를 손에 쥐고 심판소를 떠났다. 시장만으로는 결코 정의를 실현할 수 없으며 사회 구성원들이 공감할 다른 원칙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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