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1층부터 4층까지 회사 곳곳을 찬찬히 둘러봐야 하는 밤이 있다. 마지막까지 회사에 남은 자에게는 철저한 문단속이라는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혹여 손버릇을 의심하신다면 바로 거두시라. 훔쳐갈 거라고는 책밖에 없는 출판사가 아닌가.
늦은 밤 열린 창문이 하나라도 있나 싶어 알뜰히 살피는 살뜰한 당신으로 잘도 변해 가는 가운데 이상하지, 책상 곳곳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놓인 필기구 꽂이며 그에 마구잡이로 꽂힌 필기구들을 보면 뭐랄까, 마음이 짠해지곤 하였으니 말이다. 삶을 두고 저마다 살아내는 방식이 다르듯 교정지를 두고 저마다 읽어내는 눈이 다름을 증거 하는 색색의 시선들.
매년 3월 초마다 홍조 띤 얼굴로 문구점에서 한나절을 보내던 내가 있었다. '책가방 크다고 공부 잘 하냐'가 엄마의 모토라면 '새 술은 새 부대에'가 내 모토여서 새 연필과 새 노트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모녀간의 신경전이 참으로 팽팽했던 탓이었다.
볼펜 한 자루에 노트 한 권 다 쓰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됨을 알면서도 나도 참 철없었지, "왜 이렇게 우리 집은 가난한 거야?" 뺨 맞을 소리나 해댔던 걸까. 그래 봤기에 지금은 학용품에 그리 욕심 내지 않을 수 있는 터, 신학기랍시고 새 기분 내고 싶은 학생들 문구점에 북적거린다면 일단 둬보시라. 훗날 그것의 유용과 무용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도 돈을 써본 뒤에나 생기는 듯하니.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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