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한 바탕 소란을 피운 뒤 찰나에 사라진 소동이 있었다. 민주통합당의 여성공천과 관련한 민주당 남성 의원들의 반발이 그것이다. 여성 공천 비율 15%를 내건 당의 방침에 반기를 든 의원들은 치사한 여론몰이를 하다 잇속을 채울 기미가 보이자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물론 그들의 주장 중에 새겨들을 만한 부분도 있다. 지역구 의원 자리를 찜하려 쏟아 부은 자원과 노력, 열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어낸 지지기반이 여성할당제 탓에 도루묵이 된다면 누군들 억울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여성공천비율을 맞춰야 한다는 명분에 휘둘려 현실 정치 경력이 없는 여성 의원 후보들로 머릿수를 채우려 허둥대는 꼴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참작하면, 정치내공도 깊고 주민과 눈높이도 절실히 맞춰온 남성 의원 지망생들이 어떤 속앓이를 하고 있을지 충분히 헤아리고 남는다. 하물며 여성 의원의 후보감으로 입방아에 오르는 인물이 유력한 여성 법조인이나 여성운동의 스타들이라면, 이런 물 타기에 속이 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평등이란 명분 때문에 정권교체를 위한 현실 정치의 셈법을 무시한다고 떼를 써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사정을 십분 인정하더라도 '이대녀'를 들먹이는 행태를 곱게 봐줄 수는 없는 일이다. 잘난 여자 타령은 일단 치사하다. 그나마 기회의 평등 원리가 적용되는 전문직에 진출해 자리를 잡은 소수의 여성을 두고 시비를 거는 일은 너무 쪼잔하고 비겁하다. 그런 시비는 잘 날 기회도 없고 잘 나아도 여자란 이유로 푸대접을 받는 여자들이 태반이라는 것을 모른 체 한다. 그런 사정은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같은 일을 해도 남자의 몫을 더 쳐주고, 싸게 값을 쳐줄 일은 모두 여성에게 떠맡긴다는 것을 모르쇠하고 '이대녀'를 세간의 욕먹는 이런저런 '녀자들'과 한 두름에 엮어 재미를 보려는 수작은 치졸의 극치다.
그러나 정작 짚어볼 문제는 바로 할당제 자체일 것이다. 할당제를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처한 많은 문제들이 그 안에 오롯이 담겨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은 민주주의를 대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은 바로 대표의 위기이다. 대표를 대의라고 바꿔 말하면 이른바 대의-민주주의라는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는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정파를 막론하고 현실정치가 가장 애호하는 낱말이 '소통'이 되었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소통이란 말은 대의가 불구가 되었다는 점을 알려주는 징조일 따름이다. 대표의 정치가 잘 된다면 소통이 왜 필요하겠는가. 소통이란 말은 대의가 직면한 위기를 인기와 평판으로 대신하는 진정한 꼼수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당신네 정당은 국민을 대표하는가? 그런 질문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답은 사흘이 멀다고 발표되는 여론조사기관의 발표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성에 차지 않으면 온갖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중계하면 될 일이지도 모른다. 그 디지털 미디어가 그토록 과분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은 그것의 실제 효력보다는 그에 기대 대표의 위기를 어떻게든 땜질하려는 (자유)민주주의 처량한 사정을 알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표의 정치를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낡은 생각에 왜 연연해야 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문제는 대표의 정치를 넘어 정치를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이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국민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면서 여론 몰이를 하는 정당들의 '과다 대표'와 정치는 아무 것도 해주는 게 없으니 믿을 것은 우리 밖에 없다며 난립하는 숱한 시민운동의 '과소 대표' 사이에서, 민주주의는 철 지난 유행가처럼 되었다. 정치의 계절이 과연 정치의 계절인지 아리송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정치의 황혼이 뉘엿뉘엿 지고 있다는 것은 오직 나만의 착시일까.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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