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절을 하루 앞둔 29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네 장터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인접한 유관순열사추모관 앞에서는 만세 함성이 울렸고, 그 한 곁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알림판을 든 이의 침묵시위도 이어졌다.
3ㆍ1운동 93주년 순국자추모제가 열린 이날 김정애(76) 3ㆍ1여성동지회 회장은 시고모의 영정에 헌화했다. 바로 유관순 열사다.
김 회장은 1959년 유 열사의 조카 제충씨와 혼인했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딸을 가난한 독립운동가 집안에 보낼 수 없다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쓴 결혼이었지만 맞닥뜨린 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시댁 식구들 중에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에 모두 쏟아 부었으니 남은 재산도 없었죠. 하루 한끼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친정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 결혼 5년 만인 64년 서울 중앙여중고에서 교직생활을 하던 언니에게 강사 자리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을 얻어 수입이 생겼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어머니께서 매번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으니 음식도 가져다 주고 돈도 주고 오라고 하셨죠. 하지만 제게 돈을 주시진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생활비는 늘 부족했습니다."
시어머니를 탓하지 않았다. 한 평생 수의를 지으며 독립운동을 하던 시댁 시구들을 뒷바라지하는 삶을 살았던 시어머니의 역정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3ㆍ1만세운동 당시 시조부모는 현장에서 숨졌고, 시아버지(유우석)와 시고모(유관순)는 투옥돼 집안을 모두 건사해야 했던 시어머니였다. 더욱이 일본 경찰 때문에 천안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교사였던 시어머니가 함경남도 원산 등지로 전근을 다니면서 어린 두 시동생 등 가족을 부양했죠. 하지만 결국엔 시어머니 친정이 있던 강원 양양으로 돌아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 역시 양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해방 후 이 공로로 독립유공자가 된 바로 조화벽 선생이다. 김 회장의 가족 중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만 9명. 이들 중 4명이 여성이다. 김 회장은 72년 정치계에 오래 몸담았던 남편을 여의고 시어머니를 의지하며 살았지만 3년도 못돼 조 선생마저 생을 달리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기 전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내 며느리지만, 내 아들이고 딸이다'라고. 그 말씀 새기면서 40년을 버텨왔죠."
김 회장은 그 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고 그들의 삶을 재조명 하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3ㆍ1운동의 정신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염려에서 그 역사를 알리는 데도 열심이다.
"3ㆍ1운동은 자유와 평화를 위한 운동이었어요. 3ㆍ1정신은 인류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갈 젊은이들에게도 꼭 필요한 가치가 될 수 있죠."
김 회장은 "항일 반일을 외치기엔 시대가 변했다"면서도 군 위안부 문제 등 잘못된 역사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강한 목소리로 질타했다. 우리 정부를 향해서도 쓴 소리를 했다.
"위안부로 끌려가신 분들은 인권을 짓밟혔습니다. 그만큼 더 큰 치유가 필요한데도 우리 정부는 그 분들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어요. 일본의 사과, 배상과 별개로 우리 국민이 받은 상처를 정부가 나서 치유해 줘야 합니다."
천안=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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