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일본 도쿄에서 2ㆍ8 독립선언의 주동자인 재일 조선 유학생들에 대한 항소심이 열렸다. 1심 재판에선 변호사마저 유죄를 인정한 상태. 2심 변호사로 나선 후세 다쓰지는 뜻밖에도 조선 유학생들의 무죄를 주장했다. 수임료 한 푼 받지 않은 일본 변호사가 조선 민중의 편에 선 이유는 무엇일까. 3ㆍ1절 기념으로 1일 밤 10시 방송하는 KBS1 '역사스페셜'이 일본판 '쉰들러' 후세 변호사의 삶을 조명한다.
인권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였던 후세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본 내에서는 농민, 노동자 등의 권리 보호를 위해 투신했고, 국외에서는 조선과 대만의 민중을 위해 싸웠다. 그는 한일병합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폭력과 착취를 비난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1923년 후세는 조선인 학살사건이 일본군 계엄사령부와 경찰에 의한 '조선인 폭동 조작'임을 증명하는데 앞장섰다. 1926년 일왕과 왕족을 폭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돼 체포된 박열 선생의 변론을 맡아 무죄를 주장했다. 그의 행동은 '조선인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였다.
1926년 후세는 전남 나주 궁삼면 토지 분쟁의 변호를 맡기 위해 조선을 찾았다.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토지를 강제 매수하자 농민들이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가 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 식민지 농업정책을 비판한 내용은 연일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 그는 구속ㆍ투옥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지만 광복 후에도 재일 한국인의 인권 보호에 앞장서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후세 변호사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인 2004년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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