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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러고도 남을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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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러고도 남을 놈'

입력
2012.02.2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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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21일, 고종이 6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그의 생부 흥선대원군보다는 10년 정도 덜 살았지만 그 시절에는 아까운 나이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 무렵에는 전 세계에서 수천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명 '스페인 독감'이 조선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노인이 며칠 앓다가 죽는 일은 아주 흔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 궁내성은 고종이 뇌일혈로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인 대다수는 일본의 공식 발표를 믿지 않았다.

그 달 말, 천도교주 손병희 명의로 된 유인물이 나돌았다. '국민대회에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유인물에는 일제가 고종을 '독살'한 이유와 경위, 정황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들이 담겨 있었다. 요지는 이랬다. 일제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영토 재조정 문제가 논의될 것에 대비해 한국인들이 일본 통치에 순종하며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만들어 보내려 했다. 그들은 고종에게 이 성명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으나 고종은 응하지 않았다. 당황한 일제는 윤덕영과 한상학에게 고종을 살해하라고 지시했고, 그들은 고종의 수라를 맡은 궁녀 두 사람을 매수해 식혜에 독을 넣게 했다. "이를 드신 황제의 옥체가 갑자기 물과 같이 연하게 되시고 뇌가 함께 파열됐으며 아홉 구멍에서 피가 용솟음치더니 곧 세상을 떠나셨다." 식혜에 독을 넣은 궁녀들도 그 직후 독살됐다.

이 유인물에 담긴 주장과 '사소한' 차이는 있으나 유사한 다른 소문들도 나돌았다. 고종을 독살한 이유는 고종이 해외로 탈출하려 했기 때문이거나 영친왕의 결혼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설, 궁녀들을 매수한 인물은 민병석이거나 이완용이라는 설, 고종이 먹은 것은 식혜가 아니라 홍차였다는 설, 식혜든 홍차든 거기에 탄 비소를 제조한 자는 고종의 전의(典醫) 안상호라는 설. 안상호가 일본 유학생 출신인데다가 그의 처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개입되었다는 주장은 '독살설'에 설득력을 더했다.

일본이 파리 강화회의에 고종의 친서를 제출해야 할 정도로 열강이 한국 문제에 관심을 보였는지, 음료에 탄 비소를 먹으면 정말 그런 증세가 나타나는지, 죽임을 당했다는 궁녀들은 누구인지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다수 대중은 고종이 독살당했다고 '믿었다.' 일제 정보 당국은 3ㆍ1운동이 전국적,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이 '믿음'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기록했다.

근래 시중에 '의혹'이라는 이름의 갖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다. 3ㆍ1운동 전야의 '고종 독살설'과 다른 건, '대다수'가 아니라 '반쪽'만이 믿고 있다는 점이다. 각자의 이념적, 정치적 성향에 따라, 상대편에 대해서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 하고 자기편에 대해선 '그럴 리가 없는 분'이라고들 한다. 자기가 믿는 '사실'에 미심쩍은 점이 있는지 없는지는 따질 생각들조차 않는다.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면, 렌즈와 다른 색깔만 두드러지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

'판단'이 '사실'을 덮어버리는 건 심각한 문제다. 박원순 시장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제기했던 당사자가 승복했음에도, 세간에는 심지어 '아들을 바꿔치기 해서 촬영했다'는 '설'까지 나돌고 있다. 매사가 이런 식이면, 깔끔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의혹은 없다. 모두를 '신의 영역'으로 넘기는 수밖에. 이런 사회에서 인간의 상식과 합리성이 발 디딜 공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덜컥 믿기 전에 의심부터 해야 하기에 '의혹'이다.

정 상대의 '인간성'에 대한 확신을 거둬들일 수 없다면, 그의 의지만이 아니라 조건과 수단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설혹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런 짓을 할 만한 조건과 능력을 갖췄는지를 냉정히 따진다면, 의혹의 일부나마 스스로 해소할 수 있을 터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권력을 쥔 쪽이 불리하게 된다. 그러나 불리해야 깨끗해지는 게 권력의 속성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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