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은 참 굳건한 세계다.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그렇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땅이 굳건하다는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거기다 집을 지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진의 존재가 말해 주듯이 땅은 멘틀이라는 물렁한 존재 위에서 부유한다. 물렁물렁한 힘 위에 떠있는 지각의 두께는 대략 30㎞에서 70㎞정도인데 이 안에서도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지표를 흐르는 강보다 훨씬 큰 강이 흐르기도 하고, 거대한 동굴이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흙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질학에서는 '소일 크릭'(soil creek)라고 하는 이 '흙의 강'이 우리 풍수에서도 나타난다. 돈에 눈이 어두운 지관들이 몰래 남의 무덤을 훑어보고 그 중 문제가 될만한 무덤을 골라 그 후손들을 수소문해 찾아가는 것이다. 어느 집이고 한 두 가지 문제는 다 있게 마련이고, 지관은 그것이 조상의 무덤을 잘 못 쓴 탓이라고 한다. 요는, 조상의 무덤을 잘 못 쓴 탓에 관이 돌아갔거나, 없어져버렸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후손들이 무덤을 찾아가 확인 해 본다. 누가 겉에서 만진 흔적은 없는데 정말 관이 원래 방향이 아니라 돌아가 있거나, 심지어는 없어져버린 사실이 증명된다. 의기양양해진 지관이 "거 봐라"식의 협박과 회유로 돈을 뜯어내는 건 안 봐도 뻔한 수순이다. 그렇다면 관은 어디로 갔을까?
이 조화의 원인이 바로 '소일 크릭' 때문이다. 절대 귀신의 조화가 아니다. 무덤 자리가 하필 '흙의 강'이 흐르는 자리여서, 흙이 흐르는 방향으로 관이 돌아가 있거나, 아예 떠내려 간 것이다. 이 흐름은 아주 미세해서 육안으로는 잘 구분이 안된다. 처음엔 딱딱한 흙들이 나오다가 더 깊이에서 아주 부드러운 흙이 나오면 일단 의심해 봐야 한다. 그렇다면 지관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은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흙의 흐름은 관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있는 나무들도 기울어지게 한다. 땅속에 뿌리를 대고 있는 나무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이상하게 나무들이 모두 기울어져 있는 곳이면 그 밑으로는 십중팔구 흙의 강이 흐른다. 땅속을 파악하는 조사방법이 오늘날과 같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소에 부는 바람의 흐름, 햇빛의 양, 식생의 정도를 파악하고 그 다음에 토양을 예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을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한의학에서 말하는 상보성의 논리와 비슷하다. 서로 부딪히는 것이 있고, 서로 도와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는 우리의 자생풍수는 인문적 요소를 강조했다. 사람이 살만한 땅이라는 것은 일단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면 되고, 그 다음의 생활을 결정 짓는 것은 과연 거기에서 나와 남과의 관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시 되었다.
여기에서 교통, 물류를 위한 자연의 인프라가 조사되었고, 교육, 복지, 편의를 위한 인문적 조건을 검토했다. 이중환의 '택리지'가 그 대표적인 예다. 지리지라는 것은 한 인간의 편견으로 작성되는 게 아니라 그 지역의 산세와, 바위의 거칠기, 수자원의 풍부함, 농토의 질과 양, 사람들의 성정까지를 폭넓게 조사하고 분석하고, 여러 사람의 평까지 수용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작업이었다.
그러니까 풍수지리라는 것은, 땅위의 현상을 연구하는 기상학, 땅을 이루는 물질을 연구하는 지질학, 땅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지구물리학 등이다. 심지어는 바다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해양학까지를 포함하는 지구과학이고, 천문학이며, 지리학이고, 지형과 지세가 어떻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심리학이자, 그것을 정확히 표현하고 기술하는 방식에서는 문학이고, 역사고, 철학이다.
근대학문은 이 고리를 끊고 학문을 분화시키면서 발전해 왔다. 그 결과 많은 부작용이 일어났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부작용은 삶과 지식이 유리되고, 배움과 삶의 태도가 서로 따로 노는데 있다.
요즘 이런 현상을 극복하려는 '통섭운동'이 널리 퍼지고 있다. 나는 풍수지리라는, 우리에게 오래 전부터 있었던 통섭의 방법에서 이것을 찾는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