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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동네상권/ "20분 거리에 신세계·롯데 호객경쟁… 장사 될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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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동네상권/ "20분 거리에 신세계·롯데 호객경쟁… 장사 될 리가 있나"

입력
2012.02.2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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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소규모 아웃렛 점포가 몰려 있는 경기 고양시 덕이동 로데오 거리는 인적이 끊긴 채 을씨년스러웠다. 곳곳에 '폐업 세일' 현수막이 내걸렸지만, 2시간 넘게 돌아다니는 동안 상품을 구입하는 고객은 단 1명 봤을 뿐이다. 저녁이 되자 전기료를 아끼려고 조명을 절반만 켠 매장이 많아 상가 분위기는 더욱 어두웠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이곳은 주말이면 서울 인천 등지에서 몰려든 고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자유로 외곽순환고속도로 등 접근도로가 잘 뚫려 있는데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대화역과 경의선 탄현역에서도 멀지 않은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거기다 유명 브랜드 제품을 시중가의 40~50% 할인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 평일 저녁에도 불야성을 이뤘다.

덕이동 로데오 상권이 쇠퇴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 3년 전부터. 지속된 경기 침체로 문을 닫는 가게가 한두 곳 생겨났다. 그러나 경기 영향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지난해 자동차로 20분 가량 떨어진 파주에 신세계첼시 프리미엄 아웃렛(3월 18일)과 롯데 프리미엄 아웃렛(12월 2일)이 잇따라 문을 연 게 결정타였다.

그야말로 급전직하, 속절없는 추락이었다. 작년 연말 96개였던 상점은 두 달 만에 60개로 줄었다.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나마 그냥저냥 밥은 굶지 않고 살았던 영세 상인 중 3분의 1 이상이 생업을 접은 것이다. 점포 임대업체는 궁여지책으로 임대료를 30%나 내렸지만 재계약 기한인 23일까지 13개 업체가 또 폐업 의사를 밝혔다.

남은 40여개 점포도 언제 간판을 내릴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상인 윤모(57)씨는 "덕이동에서 장사하는 사람치고 빚 없는 사람이 없다. 임대보증금까지 다 까먹고 나면 길거리로 나앉는 일만 남았다"고 한탄했다.

덕이동 로데오가 형성되기 시작한 12년 전부터 의류 매장을 운영해온 이경선(55)씨는 "공룡 유통업체인 신세계와 롯데 싸움에 지역상인 새우등 다 터진다"며 한숨을 지었다. 대형 아웃렛들이 고객 유치를 위해 수시로 경품행사, 이벤트, 할인행사를 벌이는 통에 멀리서 오던 고객들이 모두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김진왕(56)씨는 "이월상품이라도 받아서 싸게 팔아야 하는데 물량이 대형 아웃렛으로만 쏠려 이마저도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대기업으로부터 서민들의 생계 유지수단을 보호해줘야 하지 않느냐", "고양시는 언제까지 상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냐" 등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질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대기업의 무차별 공세는 비단 덕이동 로데오 만에 그치지 않는다. 주택가 골목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고객들을 낚아 채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홈플러스익스프레스, 롯데마이슈퍼 등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영향은 오랜 기간 골목상권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온 슈퍼마켓은 물론 포장마차, 노점상 등 더 영세한 가게에도 치명적이다.

서울 상계동 홈플러스익스프레스(작년 3월 개점)에서 200m가량 떨어진 곳에 마트를 운영하는 정모(45)씨는 "직원을 절반으로 줄여 운영비용을 줄이고 재래시장 분위기를 연출해 차별화해도 브랜드파워와 각종 할인행사를 앞세운 대기업을 이길 수는 없다"면서 "남은 직원들의 월급이라도 제대로 챙겨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탄식했다.

상계동 롯데마이슈퍼 맞은 편에서 채소 노점을 하는 황모(52)씨는 "생활비가 떨어져 며칠 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보험을 깼다"면서 "대기업 욕심 때문에 서민들이 다 죽어가는데 정부는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송파동 홈플러스익스프레스 인근에서 트럭을 세워놓고 과일을 파는 김모(57)씨는 "지난 한 해 도매상에 진 빚이 500만원을 넘는다. 요즘 아파트 경비원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체념한 듯 말했다.

대기업들이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 조치에 반발해 헌법소원을 낸 데 대한 반감도 높았다. 송파동의 슈퍼마켓 주인 권모(48)씨는 "시민이 살아야 경제가 사는데 돈이 대기업으로만 흘러 들어가면 사회적 비용이 더 커질 것"이라며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의무 휴일을 두는 것은 최소한의 조치"라고 강조했다.

동네 빵집들 상황은 더 열악해 최근 4년 새 절반이 문을 닫았다. 연 매출 1조3,000억원(2010년 기준)을 넘는 파리바게뜨(SPC그룹), 뚜레쥬르(CJ푸드빌)와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동네 빵집은 4,250개, 프랜차이즈 빵집이 4,000여개이니 일대일 대결인 셈이다. 하지만 역전될 날도 머지 않았다.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마구잡이로 점포 수를 늘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의 한 빵집 주인은 길 건너 파리바게뜨 간판을 손가락질 하면서 증오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2년 전 프랜차이즈에 가입하라는 파리바게뜨의 요구를 거절했더니 우리 가게 바로 앞에 점포를 냈다. 탐욕에 눈 먼 대기업에 상도덕을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꼼수를 부려 장사를 해먹으면 나중에 천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영업 종사자는 약 600만명. 제조업체(약 400만)보다 훨씬 많다. 이들이 쓰러지면 나라가 쓰러진다. 자영업자들은 지금 폭발 일보 직전이다. 이들이 쏟아내는 분노의 외침에 더 이상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김민호(한양대 경영학부 4) 인턴기자

이지윤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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