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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고교다양화정책/ <상> 자율 교육 아닌 고교 서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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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고교다양화정책/ <상> 자율 교육 아닌 고교 서열화

입력
2012.02.2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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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사고 국·영·수 수업만 늘려 "등록금 비싼데 일반고와 뭐가 다른지"

#1."아주 징그럽죠."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재학생 A군의 학부모는 교육비가 부담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대뜸 이렇게 말했다. 지난 한해 고1 아들의 등록금으로만 약 400만원(분기당 100만원)을 냈다. 등록금이 끝이 아니다. "쟁쟁한 아이들 속에서 내신성적 잘 받으려면 과외가 필수라 이래저래 월 200~300(만원)씩 깨진다"는 그는 "머리가 지끈지끈하니 말도 꺼내지 말라"며 진저리를 냈다.

#2. 자사고 전환 2년 차인 E고 학부모들은 지난해부터 지역별 모임, 학교운영위원회 참석, 교장 면담, 이사장 접촉 등 일정으로 분주하다. 지역의 명문사학이 자사고로 전환하면서 기대를 품고 진학했는데 일반고와 차이점을 느끼지 못한 탓에 함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 3배에 달하는 등록금을 내는 만큼 ▦수업 질 개선 ▦원어민 교사 증원 ▦시설 개선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 교사는 "특별수업 편성 등 노력은 하고 있지만 원래 명문대 출신 교사들이 밤 12시까지 공부시켜 SKY(서울ㆍ고려ㆍ연세대) 보내던 게 학교자랑이었는데 자사고로 바꿨다고 갑자기 3배 만족이 가능하겠냐"며 "3학년보다 비싼 학비를 낸 1~2학년 학부모들은 나름대로 불만이고, 교사들은 불량교사라도 된 기분에 죽을 맛"이라고 털어놨다.

누구를 위한 학교인가

자율형사립고 정책이 표류하고 있다. 시행 3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교육의 질에 학부모 불만이 터져나오거나, 지원자가 없어 일반고로 전환하는 등 역효과만 야기하고 있다.

전국에 자사고 100곳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은 2007년 10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 측이 교육정책 공약으로 처음 발표했다. 2008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정부 보조금이 아닌 학생 등록금으로 운영하는 대신, 교육과정 등에 자율을 주고 사학간 다양한 경쟁을 유발하자는 것"이라며 "한해 최소 2,500억의 정부재정 절감효과를 누리고 사교육비도 절감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다. 교육학자들은 차기 정권에서 수정 혹은 폐기돼야 할 교육정책으로 '자사고 확대 정책'을 첫손 꼽고 있다. ▦경제력에 따른 서열화 ▦일반고 교육 황폐화 ▦획일적 교육과정 등의 이유에서다.

경제력 따라 갈린 아이들

자사고가 확대되면서 드러난 가장 큰 병폐는 고교들이 경제력에 따라 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사고 학부모 C씨는 "입학을 한다 해도 저소득층 아이들은 버티기 힘든 구조"라고 잘라 말했다. 자사고가 기초생활수급권자 등 '경제적 사회적배려대상자(사배자)'를 정원의 10%까지 선발하도록 하고, 수업료를 지원하지만 소용 없다는 것. C씨는 "다른 학교와 경쟁하느라 진도를 빠르게 나가 선행학습은 필수고, 수업에 드는 참고서 대금만 월 20만~30만원, 영어캠프 오리엔테이션 등 필수로 드는 가욋돈이 많다"고 토로했다. 그는 "단지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셈"이라고 한탄했다.

서울교육연구정보원이 2010~2011년 서울지역 고교생을 분석한 결과 월평균 가계소득이 500만원을 초과하는 학생의 비율은 특목고 50.41%, 자사고 41.85%, 일반고 19.23%, 특성화고 4.84%로 뚜렷하게 서열화돼 있었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전국 자사고의 경제적 사배자 입학생 수는 2010년 36.5명, 2011년 33명으로 정원(각 38.8명, 37.45명)에 못 미치는 미달이었다. 성기선 가톨릭대 교육학과 교수는 "경제적 여력이 있는 집단만을 위한 고교 선택권을 부여해, 교육을 통해 평등한 삶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요원한 목표가 돼 버렸다"며 "교육이 사회적 양극화를 재확인하는 기능만 하게 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지역 자사고 교사 H씨는 "학교에 워낙 고소득층 자녀들이 모여있다 보니 저소득 입학생들이 겪는 위화감도 만만치 않아, 어린 마음에 상처받고 하위권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김혜숙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는 "무분별한 자사고 정책으로 고교평준화의 틀이 사실상 깨졌고 부모의 소득에 따른 교육 계층화의 문제가 야기된 상황"이라며 "자사고 확대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양화? 획일적 서열화!

각 사학이 건학 이념에 따라 다양하고 특성화한 교육을 하게 된다는 예측 역시 빗나갔다. 교육과정 운용에 자율성이 주어지자 자사고들은 너나 없이 입시에 필요한 주요 과목에만 집중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전국 45곳 자사고를 조사한 결과 국ㆍ영ㆍ수 수업을 늘린 학교는 각각 25곳, 31곳, 33곳에 달했지만 기타 수업을 늘린 학교는 단 2곳(예체능 1곳, 한문 1곳)에 불과했다.

한 자사고 학부모는 "아이가 어려서부터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해 인성교육을 잘 시킬 것 같은 미션스쿨(종교재단 계열 사학) 자사고에 진학시켰는데, 막상 학교 목표는 입시과목을 혹독하게 가르쳐 명문대 보내는데 맞춰져 있다"며 "아이들이 조금만 템포를 늦춰도 한발 뒤처질까 전전긍긍하고 밤 10시면 교문 앞?학원차가 즐비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부모는 "자사고에서 입학사정관제에 유리한 각종 특별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받은 것은 관련 상담 뿐"이라며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양승실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은 "자율성 다양성 추구는 세계적 추세지만, 학생들 목표가 모두 명문대 합격으로 쏠린 현실은 감안하지 않고 갑자기 자율성을 줬으니 당연한 결과"고 지적했다. 양 위원은 "모두가 좋아하는 반찬이 같은데, 마음대로 장사를 하라면 상인들이 다양한 반찬을 팔지 않겠냐고 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상위권은 자사고ㆍ특목고로… 일반계고의 몰락

지난해 서울 강북 A고교의 전교 1등 졸업생은 서울의 중하위권 대학에 합격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1990년대 초만 해도 서울대에 많게는 한해 10명 가까이 진학시켰는데 이제 이른바 SKY대(서울·고려·연세대)에 갈만한 최상위권 학생은 특목고로, 그 아래 상위권 학생은 자율형사립고(자사고)로 간다. 특성화고에서 떨어진 학생도 온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의 고교다양화 정책은 이전 정부의 교육정책이 획일화와 하향평준화를 초래했다는 비판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좋은 학교(자사고)를 많이 만들어 상향평준화를 하겠다"던 의도와 달리 일반계고의 교육환경은 오히려 황폐해졌다.

지난해 교육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고교 1학년 8,13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중학교 최종성적이 최상위권(5% 이내)에 속한 학생들의 비율은 일반계고의 경우 5.7%에 불과했다. 반면 하나고, 민족사관고 등 전국 단위로 선발하는 자사고는 83.9%, 외국어고는 53.8%, 지역단위로 선발하는 자사고는 비평준화지역이 62.4%, 평준화지역이 17.9%로 일반계고와 격차가 심했다.

지난해 4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사들의 81.8%는 "고교다양화 이후 일반계고 입학생의 성적 수준이 낮아졌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에서도 일반계고의 몰락은 두드러졌다. 국영수 세 과목에서 '보통학력 이상' 학생 비율이 높은 서울 지역 상위 20개 고교에는 특목고와 자사고가 각 9곳이었고, 심지어 특성화고도 2곳이나 포함됐지만 일반계고는 한 곳도 없었다.

이러한 학력 격차는 학업분위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A고교 관계자는 "학생들은 1등을 해도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패배의식에 휩싸여 면학분위기 조성이 안 된다"며 "우수 학생이 적어 대학진학 실적이 나쁘고, 이런 평판 때문에 고교선택제 하에서 기피학교가 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전국교직원노조의 한 고교 교사는 "일반계고를 낙오자 집합소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일반계고 교장은 "90%의 학생들이 다니는 일반계고는 사실상 정부 정책에서 배제된 상황"이라며 "그나마 내신 성적에서 유리해 일반계고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절대평가가 도입되면 자사고, 특목고 쏠림 현상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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