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없어서 춥게 다니는 친구들 손을 매일같이 난로 앞에서 녹여 주시던 그런 분이었어요."
전 재산 5억원을 의학 연구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26일 서울대병원에 기부한 퇴직 여교장 고 이순길씨 사연을 60년도 더 된 제자 김예자(71)씨는 이렇게 전했다. 23일 향년 91세로 작고한 이씨의 초등학교 제자들은 그를 '참 따뜻하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이씨지만 정작 그는 세상에 가족 한 명도 없이 홀로 살아왔다. 평생독신이었다. 192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나 일제 시대 때 유학을 위해 어머니와 단 둘이 서울에 왔던 이씨는 6ㆍ25전쟁이 터지면서 다른 가족과 연락이 끊기고 서울에 남게 됐다. 이씨는 진성여고와 공주사대를 졸업한 뒤 서대문, 수송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등을 거쳐 88년 서울 삼광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할때까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아동 교육에 바쳤다.
평소 이씨를 아끼던 제자와 동료들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를 여읜 후 본격적으로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봐 왔다고 한다. 혈혈단신 외롭게 지낸 본인의 모습과 겹쳐진 탓이다. 49년 당시 서대문국민학교 제자였던 김예자씨는 "1,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는데 등교하면 늘 가난해서 못 입고 못 먹는 친구들을 곁에 두셨다"며 "5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이씨가 모든 재산을 서울대병원에 기부하게 된 것도 폐렴, 피부질환 등으로 병원을 찾을 때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의 사람들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씨의 한 제자는 "본인의 모교인 진성여고에 전 재산을 기부 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학교보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에 도움이 절실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전했다.
50년 가까이 서울대병원에 한 달에도 수차례씩 다녀가면서 의료진들과 정이 든 것도 기부의 또다른 이유였다. 6년 전 강서구의 실버타운으로 입주한 뒤에도 근처 병원을 두고 멀리 서울대병원을 찾는 것이 이씨의 유일한 외출일 정도였다.
이씨의 장례식은 23일부터 3일장으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숨을 거두기 전 그는 김예자씨를 불러 장례 비용을 넉넉하게 전달했다. "장례식만큼은 화려하게 해달라"는 당부도 남겼다. 김씨는 "이 선생님은 동료들 중 청혼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홀로 지내셨지만 마지막 모습만큼은 화려하고 싶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가족이 없는 고인을 위해 직원들이 직접 장례식 시작부터 발인까지 밤새 일손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병원 측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기부금을 질병 치료 연구에 사용할 예정이다.
채희선기자 hsch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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