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정시의 적자로 꼽히는 두 시인이 나란히 시집을 냈다. 장석남(47)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발행)와 문태준(42)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먼 곳> (창비)이다. 먼> 고요는>
▦장석남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세상의 '징검다리' 되고픈 비움과 느림의 시어
장씨는 2년 만에 펴낸 새 시집에서 비움과 느림의 삶을 추구한다. 가난을 '맑고 호젓한 가계(家係)'라 부르며 '그런 데 가서 그 아들 손주가 되겠다'고 하고('가난을 모시고'에서), '저물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 가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모과의 일')라고 노래한다.
그의 '호젓함의 서정'(문학평론가 엄경희)은 오롯이 자연에서 길어낸 것이다.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이른 봄빛의 분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발목이 햇빛 속에 들었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저것이 아닌가 하는 물리(物理)도 생각하고 있습니다'('안부'). '흰 돌멩이 처음 그 자리에 앉던 시간의 문 따고 나오는 눈빛 따스하여 나는 그걸 알뜰히 모아 새 담장을 치려 한다// 문은 새삼 내지 않으려 한다'('담장').
'봄빛의 분주'와 '돌멩이의 눈빛'에서 생의 이치를 읽어내는 시인의 통찰은 기다림이라는 노역의 대가다. '수로에 외발로 서서 고개 움츠리고 비 맞는 왜가리'처럼 '어떤 기다림도 잊고 다만 기다림의 자세만으로 생을 채우려 용맹정진'하는 와중에 드물게 찾아드는 깨달음이다('수로에서'). 이를 위해 시인은 '어머니의 기도를 버리고 또/ 세상의 불빛도 아득'한 오솔길을 자진해서 걷는다('오솔길을 염려함'에서).
이처럼 험한 생의 여정은 그러나 시인 스스로 고고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수록시 '물의 여정'의 결구는 이렇다. '한겨울 시퍼런 얼굴을 씻는 절간 수좌의 손가락 사이에선/ 그만 냉기도 성씨도 놓고 마는,/ 이민자가 되는'. 그러니까 시인은 '절간 수좌' 같은 자신의 고행이 세상의 '냉기도 성씨도' 눅이는 데에 보탬이 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이런 이타심은 '내 유산으로는/ 징검다리 같은 것을 하고 싶어'('나의 유산은')라는 바람에서도 확인된다. 별러서 장만한 무쇠 솥에 거는 흐뭇한 기대에서도. '이 솥에 닭도 잡아 끓이리/ 쑥도 뜯어 끓이리/ 푸푸푸푸, 그대들을 부르리'('무쇠 솥')
속화되는 자신에 대한 절절한 반성을 담은 지난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 (2010)를 거쳐 시인은 한결 초연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혹독했을 자기 단련을 증거하듯, 시어도 한층 차분하고 농밀해졌다. 뺨에>
▦문태준 '먼 곳'
생의 '먼 곳' 들여다보는 불교적 윤회의 구도
문씨의 새 시집 제목은 그의 시적 변모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일상과 풍경에 대한 비범한 관찰력을 서정의 견인차로 삼았던 이전 시집 <그늘의 발달> (2008)에 비해, 이번 시집은 불교적 사유를 통해 생의 '먼 곳', 다시 말해 좀 더 근원적인 생의 이치를 탐구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늘의>
윤회 사상에 바탕한 시편들이 특히 눈에 띄는데, 돌은 시인에게 사유의 통로가 되곤 한다. '나는 끝내 풀지 못한 생각을 들고 다시 캄캄한 내부로 들어갈 것이다/ 입술도 귀도 사라지고 이처럼 묵중하게만 묵중하게만 앉아 있을 것이다'('바위') '냇가에 앉아/ 젖은 몸을 말릴 때 보았던 돌/ 내 사는 예까지 찾아온 돌/ 후일에는 물속에 깊이 잠길 돌/ 내 다시 와 내일을 산다면/ 그때는 더 작아졌을 돌'('돌과의 사귐').
가장 아름다운 수록시 중 하나인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에서 시인은 '이곳에서의 일생은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는 일'이라 하며 생멸의 비극적 순리를 노래한다. '누가 있을까, 강을 따라갔다 돌아서지 않은 이/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지 않은 이/ 누가 있을까, 눈시울이 벌겋게 익도록 울고만 있는 여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이/ 누가 있을까, 생의 흐름이 구부러지고 갈라지는 것을 보지 않은 이'.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운명에 번잡하고 고달픈 일상이 더해진 '오만하고 값싸고 변덕스러운' 삶을 향해 시인은 '그대가 생각하는 극형으로/ 나를 선처해다오'라고 부르짖기도 한다('유형').
그런 시인에게 밥 먹자, 하시는 늙은 어머니의 부름은 커다란 위안이 된다. '막 푼 뜨거운 밥에서 피어오르는 긴 김 같은 말씀/ 원뢰(遠雷) 같은 부름/ 나는 기도를 올렸다,/ 모든 부름을 잃고 잊어도/ 이 하나는 저녁에 남겨달라고'('어떤 부름'). '희망을 끊어버리고 연고 없는 사람처럼' 살아갈 때 '그'가 건넨 말도 시인에게 구원처럼 다가온다. '뭐든 돋아 내밀듯이 돋아 내밀듯이 살아가자고'('사무친 말') 하여 시인은 다시금 절박하게 생의 의지를 다진다. '내 낱잎의 몸에서 붉은 실을 뽑아/ 풀벌레여, 나를 다시 짜다오/ 너에게는 단 한 타래의 실을 옮겨 감을 시간만 남아 있느니'('그 아무것도 없는 11월').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