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생소한 듯 하지만 진보 사회학자인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중민이론'의 주창자다.
'중민이론'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말에 태동했다. 언뜻 서구의 부르주아지 개념과 유사하지만 차이점도 크다. 그는 한국 사회의 독특한 변혁 세력을 형성한 계층을 중민(中民)이라고 호명했다. 먹고 살만한 중산층 중에서 민중에 가까운 세력, 특히 민중에 대한 부채 의식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일단의 부류를 칭한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변혁을 이끌었고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전한 중간 세력 정도로 보면 될 듯하다. 일각에서 극단적으로 자본주의의 폐기가 논의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4.0, 따뜻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등 현 체제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대두되고 있는 시점이다. 중민사회이론 연구재단을 창립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한 교수를 서울 봉천동 재단사무실에서 만났다.
-저서 <중민이론의 탐색> 을 사려고 서울 시내 서점을 다 뒤졌다. 중민이론의>
"절품됐다. 1992년에 나왔다. 1989년 그때 최초로 계간지에 장문의 글을 썼다. 그때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다. 당시 대학가에는 급진적인 변혁이론으로 무장된 대학원생, 젊은 박사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중산층은 좀 보수적이고 사회변혁을 이끌어내는 주요세력이 되기에는 좀 부족하다고 봤다. 대신 민중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그게 과격화하면서 무산계층론이 나왔다. 이 세력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온몸으로 노동을 하고 봉사를 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 이론을 전면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중산층은 나이가 좀 많고 산업화의 주역이 되어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부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젊고 교육수준이 높은 부류는 적어도 권위주의체제에 저항하는 성격이 강했다. 1985년 6차례에 걸쳐 서베이를 했다. 언론인, 공무원, 중산층, 신중산층, 구중산층 등등 전국을 다니면서 1년 내내 조사했다. 당시 중산층을 한 묶음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이들 중 변화를 감수할 수 있는 세력에 대해 우리가 적절하게 호명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중민이다.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바른 목소리를 내려하고 민중에 대해서 부채의식을 가지고 도와주려 한다. 이 세력이 민주주의를 이끄는 중추세력이라는 것이 요지다. 당시 보수세력은 대학가에서 펼쳐지는 급진 이념은 체제 전복이라면서 중산층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시키고 있을 때였다. 중민이라는 집단을 끄집어내니 보수ㆍ진보 진영 양쪽에서 공격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1987년에 수많은 화이트칼라들이 시내로 나오고 전두환 정권도 바뀌니까 중민이론이 현상들을 제대로 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중민의 구체적 개념이 뭔가.
중민은 생활수준은 중산층이지만 의식이나 가치관, 행동양식은 서민적, 민중적 특성을 가진 집단이다. 그런데 두 가지 조건 속에서 정체성이 매우 강하게 일어난다. 하나는 신분 변동이 빨리 될 때다. 상승이동 하는 사람들 중 어떤 부류는 '나는 계속해서 돈도 많이 벌고, 권력도 잡겠다'고 하지만 다른 부류는 자기 자신의 뿌리가 노동자 농민이라고 보고 좀더 민중적인 눈으로 사회를 바라본다.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이 있고, 군부독재, 권위주의 체제에 대해서 저항하게 된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뿌리가 민중이다'라는 민본개념이 굉장히 강하다. 민본의식이 강한 곳에서는 항상 민과 관을 조화로운 것보다는 대치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관은 기득권이 있고, 부패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망간다. 반면 민중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일어난다. 이런 조건하에서 중산층이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건강한 민중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다.
-유교적인 냄새가 풍긴다. 자본주의와 유교사상이 결합한 건가.
그럴 수 있다. 정치와 연관해서 유교의 핵심은 역시 민본이다. 모든 통치의 뿌리가 백성에게 있다. 과거에는 위민정치라고 했다. 덕치를 이룬 군주가 좀 더 마음을 열어 백성의 소리를 듣고 백성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위민사상이 된 것이다. 백성, 민의 뿌리는 시대의 발전에 따라서 바뀐다. 그 뒤에 민주주의 사상이 들어왔다. 민주주의 사상이 좀 더 빨리 착근되는 곳이 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곳이다. 이 과정에서 소통이 정말 중요하다. 옛날에는 '면대면' 소통이지만 근대로 들어오면 신문, TV 등 대중매체에 의한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 그것이 근대를 만들어 놓은 특징이다. 하지만 요즘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이제 쌍방을 넘어 다방변화로 일어난다. 따라서 이제는 단순히 대의민주주의라는 형태로 투표, 정당의 선택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 시대로 들어갔다. 정보를 보고 감시하고 토론한다. 따라서 민본이라고 하는 개념이 직접 민주주의로부터 참여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됐다. 국민이 여러 방식으로 참여하는 통로가 늘어나고 그걸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재단의 궁극적인 목표가 뭔가.
사회가 발전하려면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물론 나와야 된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더 트여야 한다. 또 역사를 옳은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생각이나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양극화나 충돌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뒤틀리고 있다. 국민은 들끓고 정치는 엉망이다. 싸움이 심하면 결국은 에너지가 소진된다. 몇 사람의 소수 지도자가 할 수 없다.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중민이다. 중민의 특징은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게 아니고 소외된 사람들의 권익을 생각하고 더불어 같이 살 의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인습이나 권위에 흥정하지 않고 합리적, 이성적으로 논의를 하려 한다. 그런 중민들의 잠재력이 꽃필 수 있도록 필요한 조사, 연구, 토론, 활동에 대한 것들을 많이 하자는 것이다.
-후원 기관이 있나.
없다. 흔히 재단 같은걸 하려면 후원자를 먼저 찾고 시작하는데 난 절대 그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재단이 자기의 정체성을 잘 살려서 옳은 방향으로 나가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앞으로 3년은 충분히 자력으로 꾸려 갈 수 있게 만들었다. 다 개인 재산이다. 아들이 돈이 좀 있어 도와줬다. 안사람이 한양대 교수다. 우리 부부 재산을 좀 털었다.
-위르겐 하버마스, 울리히 백 같은 석학들이 참여한다.
아주 친하다. 하버마스의 저서는 내가 서울대 학부시절부터 참 열심히 읽었다. 그 사람 저서를 읽을 때 마음에서부터 확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독일어가 사유의 지평을 여는데 아주 탁월하다. 명사 조합들이 많아 굉장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언어다. 1979년에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독일로 가서 공부하다 만났다. 1996년에는 서울대에서 초청도 했다. 울리히 백은 5년 정도 전에 만났지만 지적인 협력을 많이 했다. 백도 서울대에 왔었고 2010년에는 일본에서 토론도 많이 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재단에 기여하나.
"아직은 기여가 없다. 그들을 초청해 한달 정도의 긴 기간을 잡아서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탐색을 할 계획이다. 하버마스는 건강이 좀 나빠 걱정이다.
-근대화의 압축모델을 넘어서는 모델이 가능한가.
내가 앞으로 주장하려는 게 제2근대화다. 아시아의 경우 1차 근대화는 일본을 포함해 대부분 서구로부터 받은 쇼크로부터 출발했다. 중국은 1848년에 아편전쟁으로 하도 당해서 그 쇼크 때문에 '서구를 따라가자' 라고 한 것이다. 때문에 과거 전통에 대한 긍지를 살리지 못한 채 서구를 모방하고. 복제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성공한 나라가 있고 성공하지 못한 나라가 있다. 근데 대체로 동아시아의 나라들은 성공하고 있다. 중국도 성공한 케이스다. 문제는 그렇게 앞만을 보고 죽어라 달리다 보니까 소통도 무너지고, 사람의 삶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우리나라는 '특별히 위험한 나라'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성장의 부산물이다. 동아시아에서 제2근대화에 대한 호소력은 훨씬 크다. 서구는 자기 힘으로 발전한 나라다. 자기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약하다. 우리는 과거를 상실하고 전통을 망각한 채 서구를 따라갔다. 어느 시점이 되니까 '꼭 그렇게 가야 하나'는 생각을 한다. 전통을 현대의 눈에서 다시 보게 된다. 서구는 전통자산을 다 써먹었다. 한계에 도래했다. 반면 우리는 전통을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찾을 수 있다. 제2근대화가 필요하다. 이중 소통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제3의 길, 자본주의 4.0, 따뜻한 자본주의 등에 대한 갈구가 많다.
제3의 길에 대해서는 나도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탈노선이다. 제3의 길이 태동했던 1930년대 스웨덴 모델도 결국은 배타적 조합 모델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영자와 노동자의 조합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풀기에는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대안을 어떻게 할거냐가 초미의 관심사다.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현 가능해야 하고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힘이 나와야 한다.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큰 데가 동아시아다. 제2근대화라고 하는 것이 최선의 개념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회의가 있고 매력적이지도 않다. '또 근대화야'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적절한 개념을 아직 찾지 못했다. 선진화 같은 개념으로는 안된다. 서구와 비교할 수 있는 개념으로 나가야 학문적으로 대화가 된다. 일회성 용어에 빠지면 안된다. 제2근대화는 잘하면 가능하다. 근대화의 실패로 인해 제2근대화가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근대화가 놀라울 만큼 성공 거두면서 의도치 않았던 부산물이 자기 파괴적으로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에 근대화를 한 단계 질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끌고 가자는 뜻이다. 과거에는 새로운 대안으로 이념이나 거시이론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2근대화가 지향하는 것은 비교적 실용적이다. 시민들이 처한 다양한 위험을 어떻게 잘 관리하고 예방할 것이냐는 것이다. 크게 보면 이념정치가 아니라 생활정치적인 패러다임이다. 서구에서도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념에서 탈출구를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버렸다. 진보란 우리가 부딪히는 위험,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이 위험을 문제 삼는 거다. 핵, 지구 온난화도 그렇다. 인류를 멸망시킬지 모를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삶의 안전을 확보해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 것이냐라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성장모델은 아니라는 얘기인가.
국가 중심으로 모든 걸 끌고 가기엔 우리 사회가 너무 복잡해진 측면이 있다. 이걸 좀 벗어나 시민 사회의 역동성이 오히려 활발하게 꽃피면서 이것이 국가, 정치제도와 잘 결합되어 신축적으로 굴러가는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기술 등이 필요한데 국가 중심적 시대를 넘어서는 다음 단계를 크게 봐서는 제2근대화의 시기로 볼 수 있다. 단순화 시킨다면 우리는 상당히 빨리 진입했다고 생각한다.
-대학 교수에 대한 미련 같은 것 있나.
서울대에 있을 때 보직이라고는 학과장 해 본 것 밖에 없다. 그런데 늘 주변 사람들이 학교를 떠날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시절부터 내가 적극 코멘트 했다. 하지만 그분과 굳게 약속한 것은 '나는 절대 정치 안한다. 나는 학자의 길을 가면서 도울 수 있는 일은 사양하지 않고 돕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그걸 끝까지 지켜주셨다. 단지 사회학을 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아쉽고 좀 더 잘했어야 했다고 자책하는 것이 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났을 때 쇼크가 컸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된다는 절규가 나타났다.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는 너무 컸다. 또 남북관계도 그랬다. 학자로서 연구에 뛰어들었어야 했다. 근데 당시 어떤 의미에선 난 너무 여권이 되어 버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랑 너무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런 내가 뭘 한다고 하면 사람들 눈이 결코 따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가까운 사람에게 따뜻한 시선을 주지 않는다. 학계는 더 그렇다. 그래서 못했다. 그게 제일 아쉽다.
▦한상진은 누구
1945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70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남일리노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빌레펠트대 연구교수 등을 거쳐 81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2010년까지 일했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조재우 선임기자 josus6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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