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국가의 성립 이후 정치와 경제의 분리는 민주주의의 기본 명제였다. 부를 거머쥔 이가 정치 권력까지 탐하다 성공한 예는 손에 꼽을 정도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나 탁신 치나왓 전 태국 총리 등이 재벌 출신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랐지만 오랜 실정 끝에 권좌에서 쫓겨났다.
특히 러시아에서 재벌은 아예 정치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 ‘올리가르히(신흥재벌)’로 대변되는 러시아의 억만장자들은 1990년대 소련 해체 후 국유 재산의 민영화 과정에서 권력과 결탁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권력 전면에 등장하자 가차없이 철퇴를 맞았다. 한 때 러시아 최고 부호였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는 대권 야심을 드러냈다가 아직도 철창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고, 언론 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는 푸틴에게 밉보인 죄로 해외에서 낭인생활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12월 미하일 프로호로프(46ㆍ사진)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80억달러(20조2,600억원)의 순재산을 보유한, 세계 32번째 부자가 푸틴에 반기를 들 이유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가 푸틴의 오랜 후원자였고, 친여 정당을 이끄는 수장이라는 점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무마하려는 크렘린의 기획 출마설에 오히려 무게가 실렸다.
그러나 프로호로프는 러시아 대선을 2주 앞두고 자신이 푸틴의 대관식을 위한 들러리가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그의 지지율은 5%선. 사실상 당선 가망성은 없지만 출마 당시 1% 언저리를 맴돌던 지지율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프로호로프의 약진 배경은 솔직함과 적극성, 표심을 꿰뚫은 선거 전략에 있다. 그는 엄청난 재산가임을 당당히 밝힌다. 그의 선거 전략가인 안톤 크라소프스키는 “유권자들은 부자를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부패로 얼룩진 축재 과정에 분노한다”고 말했다. 여느 올리가르히와 달리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노력 하나만으로 부를 일군 자수성가형 스토리를 강조한 점이 서민층에 먹혀 든 것이다.
대선 슬로건 “(우리는) 더 많이 원한다”에서 보듯, 프로호로프는 젊은층의 개혁 욕구도 정확히 읽어내다. 석유 위주의 경제구조 재편, 부패 일소, 정치에 경쟁체제 도입 등이 그가 내세운 공약들이다. 러시아 독립 여론조사 기관인 레바다센터에 따르면 반 푸틴 시위대 사이에서 프로호프의 지지율은 20%를 상회한다.
뉴욕타임스는 “서민층이 대선의 단골 손님인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에 식상한 점도 프로호로프가 푸틴의 대항마로 급부상한 비결”이라며 “러시아에 새로운 유형의 재벌 정치인이 등장했다”고 평가했다.
김이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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