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부위 모공 크기를 줄이려 최근 피부과에서 레이저 시술을 받은 40대 초반의 한 여성이 고민에 빠졌다. 화장으로 가려지는 정도였던 기미가 시술 후 되레 더 까맣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공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병원에선 시술을 몇 차례 더 해보자는데, 이미 심해진 기미 때문에 의료진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터넷에는 이처럼 레이저 시술을 받은 뒤 부작용으로 고생하거나 큰 맘 먹고 비싼 돈을 들였는데 기대한 만큼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소비자들의 사연이 줄을 잇는다. 의료진조차 원인을 알 수 없다 하면 환자만 억울할 뿐이다. 그런데 최근 쓰고 버려야 할 레이저 부품이 일부 개원가에서 유통되고 있어 피해가 예상된다. 병원이 어떤 장비나 부품을 쓰는지 소비자 스스로 시술 전 꼼꼼히 확인하는 게 상책이다.
소모품을 반영구품으로 변형
미국에 본사를 둔 의료기기업체 S사에 따르면 모공이나 여드름, 기미 등 미용시술을 하는 일부 국내 병ㆍ의원에서 폐기돼야 할 레이저 시술용 부품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부품을 써서 치료를 받으면 기미가 생기거나 악화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레이저 시술을 받을 땐 보통 눈을 가리기 때문에 환자는 자신이 정품 부품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게다가 정품과 정품 아닌 부품이 겉으로 언뜻 보기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문제가 된 부품은 레이저 장비 본체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부분에 끼워 쓰는 팁으로 직접 피부에 닿는 레이저의 양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팁이 피부에 접촉하는 순간 내장돼 있는 센서가 레이저의 양을 측정해 피부 속으로 에너지가 얼마나 전달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6~8번 쓰면 폐기하고 새 팁으로 교체해야 한다.
그런데 S사가 국내에서 수거한 일부 팁이 사용 횟수를 제한하지 않아도 되도록 내부 구조가 변형돼 있다. 이런 팁을 사용하면 시술시 레이저 장비가 팁에서 어느 정도의 레이저가 나오는지를 정확히 계산하지 못할 수 있다. 또 정해진 횟수 이상 쓰면 팁 속 유리에 미세한 흠집이 생겨 레이저가 나오면서 굴절이나 반사가 될 수 있다는 게 S사의 설명이다.
정찬우 리더스피부과 대표원장은 "(변형된 팁은) 장비를 미세하게 컨트롤할 수 없으니 레이저가 피부로 균일하게 나오지 않을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레이저가 지나치게 많이 나오면 피부에 색소침착(기미)이나 흉터, 화상 등의 손상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적게 나오면 당연히 시술 효과가 떨어진다.
S사는 일부 소규모 의료기기 유통업체가 이런 팁을 만들어 '재생팁'이라는 이름으로 병의원에 파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 서초구에서 피부과를 운영하는 한 의사는 "레이저 장비 수리에 대해 한 의료기기 대리점에 문의했더니 직원이 병원으로 직접 찾아와 다른 병원에선 이미 많이 쓰고 있다며 재생팁에 관심 있으면 연락하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귀띔했다.
이 의사가 들었다는 재생팁 가격은 500만원 선. 한번 사면 환자 수십 명, 수백 명에게 계속 쓸 수 있다. 정품 팁은 약 70만원이지만 자주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비용이 더 든다.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병의원으로선 뿌리치기 힘든 유혹일 수 있다.
222곳 중 86곳만 정품 팁 구매
팁을 소모품으로 쓰는 S사의 F장비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국내 피부과뿐 아니라 성형외과, 가정의학과, 비만이나 미용클리닉 등에 200~300대 가량 보급됐다. S사 관계자는 "지난해 파악한 이 장비 사용자는 222명인데 이중 86명만 정품 팀을 구매했다"며 "장비를 더 이상 쓰지 않는 곳도 있겠지만 상당수가 재생팁으로 시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생팁 사용 여부를 병원별로 파악하려고 시도했으나 일부 병원에서 방문을 거부해 확실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게 S사의 설명이다.
이현승 이현승피부과 원장은 "재생팁 때문에 생길 수 있는 피해를 막으려면 환자 스스로 시술비가 턱없이 낮거나 피부 전문의가 운영하지 않는 병의원을 찾지 않는 게 최선"이라며 "환자가 의료진에게 사용 중인 장비와 정품 사용 여부에 대해 직접 물어보는 꼼꼼함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S사는 지난해 12월부터 자사 F장비를 사용하는 병원 중 정품을 구입해 쓰는 곳에 정품 인증패를 주고 있다. 지금까지 전국 30여곳이 인증패를 받았다.
그러나 의료계에서는 수억 원대의 장비에 고가의 소모품을 함께 팔아 큰 이익을 남기려는 해외 의료기기업체에 병의원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 브랜드와 경쟁할 수 있도록 값이 싸면서도 성능은 뛰어난 장비를 독자 개발하기에는 국내 의료기기 시장이 열악하다는 것이다.
한 피부과 개원의는 "해외 의료기기 브랜드에서 팁 같은 소모품을 고가에 공급할수록 환자가 부담해야 하는 시술비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개원가에서 F장비의 시술비용은 현재 얼굴 전체를 1회 시술하는데 80만원 선이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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