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서울에는 ‘심판의 바람’이, 부산에는 ‘문재인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부산 바람은 심상치 않다. 4월 총선을 넘어 12월 대선까지 덮칠 기세다. 바람을 탄 민주통합당은 벌써 만선(滿船)의 흥취에 빠진 듯하고, 바람을 맞는 새누리당은 찢긴 돛을 손질하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바람은 늘 바뀌는 법. 풍어의 노래를 부르며 귀환하는 어선이 역풍에 좌초할 수도 있고, 흉어의 고통 속에 헤매던 빈 배가 고기떼를 만날 수도 있다. 그게 바람의 현상이고, 선거의 이치다.
2004년 17대 총선을 복기해보자. 선거를 한 달 앞두고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자민련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시킨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국민은 분노했고 ‘노무현을 구하자’는 바람이 태풍처럼 불었다. 여론조사로는 열린우리당이 190~200석까지 얻을 것으로 전망됐다.
결과는 과반의석(152석, 38.3%)을 확보한 우리당의 승리였지만, 한나라당도 ‘100석만 얻어도 다행’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121석(35.8%)을 확보했다. 주목할 대목은 2000년 15대 총선에 비해 한나라당의 득표율이 3.2%밖에 줄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중반에 정동영 우리당 의장의 ‘노인폄하 발언’도 있었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천막당사 승부수도 있었지만, 탄핵 열풍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선거는 바람만큼 구도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 선거였다.
구도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1997년 15대 대선과 2002년 16대 대선이다. 15대 대선은 외환위기만으로도 집권당인 한나라당이 일찌감치 손을 들었어야 했던 선거였다. 더욱이 김대중, 김종필 두 거두가 DJP연합을 이루었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의혹까지 겹쳤다. 뿐만 아니라 이인제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해 무려 492만 표(18.9%), 특히 부산ㆍ울산ㆍ경남에서 30%에 가까운 127만9,000여 표를 얻었다. 그럼에도 DJ는 겨우 39만557표, 1.5%를 이겼을 뿐이다.
16대 대선도 그랬다. 이회창 후보는 아들 문제에다 호화빌라 사건, 며느리의 원정출산 의혹 등으로 큰 상처를 입었고,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극적인 정치역정,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미군 장갑차에 숨진 두 여중생 사건 등이 겹쳐지면서 기세를 올렸다. 또한 부산 출신으로 부산ㆍ울산ㆍ경남에서 120만여 표(29.4%)를 얻었다. 하지만 격차는 2.3%, 57만 표에 그쳤다.
그만큼 영남, 보수우파의 저변이 강하다는 것이다. 영남은 역대 선거에서 충청, 강원을 묶어 DJ로 상징되는 호남을 고립시키는 전략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게 15대 대선에서는 DJP연합으로 깨졌고, 16대 대선에서는 지역성이 엷은 서울 경기 충청의 진보 내지는 중도세력이 대거 노무현 지지를 택하면서 한나라당 대 반(反)한나라당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중반 이후 보수세력의 집요한 공격에다 내부 분열이 겹치면서 한나라당은 선거마다 연전연승하고 2007년 17대 대선, 2008년 18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보수 정권이 최소 10년은 간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고, 노무현 사람들은 스스로를 폐족(廢族)으로 자책했는데, 현 정부의 실정으로 불과 4년 만에 정권 심판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선거에서 나타났듯이 바람이 거세면, 물밑에서는 구도에 따른 견제세력의 결집도 강해진다. 다만 과거와는 달리 인터넷과 SNS의 발달, 젊은 층의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지면서 지역색이 엷어지고, 문재인이 박근혜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됐다는 점이 변수로 부각되고 있다. 부산이 전통적 구도대로 갈지, 아니면 문재인을 ‘우리 사람’으로 인식해 밀어주기를 택할지가 관심사다.
부산의 선택에 따라 지금의 바람은 대선까지 뒤흔들 태풍이 될 수도 있고, 총선 고개도 못 넘는 미풍이 될 수도 있다. 부산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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