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그늘이 많은 사람 나는 지금 그의 곁에 없지만
노트 겉장의 글씨처럼 아직도 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쓰고 천천히 읽는다
오후 세 시의 사랑은 오후 세 시에 끝나고
더운 물에 손을 씻는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이라도 읽을까 눈을 들어
강변으로 나 있는 송전선보다 빨리
나는 저녁의 그 집에 닿고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걸음걸이로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중략)
해바라기가 많은 그 집으로 이사를 하지요 그럼
당신의 아이를 서른 명 낳아 주겠어요
서른 명 서른 살
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낙엽을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
그는 그림 속에서 잠자고
그림 속에서 식사를 한다
그때 서른 살이 언덕 너머 멀리에 있을 때 그때
나는 왜 그곳을 지나갔을까
해바라기 씨앗이라도 사올까
씨앗만이라도
오후 세 시 전화로 끝나 버리는 사랑
나는 순결한 사각형으로 남아 있고
그의 여름 휴가는 어디에 가 있을까
강변으로 나 있는 의자에는 먼지가 쌓여 있다
서른 살
그는 아직 나를 모르고 해바라기는 불을 끈다
나는 이미 서른 살인 것이다
● 이십대를 무엇으로 버티셨는지? 전 스무 살엔 기형도의 시집을 들고 다녔고 그 뒤 서른 살까지는 쭉 최승자의 시집을 읽었던 것 같아요.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낙담했을 땐 고흐의 그림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는데. 기형도 시인은 사진으로만 보았고, 고흐는 오직 그가 그린 별밤과 해바라기들로만 만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서른 살이 언덕 너머 멀리에 있을 때, 알 수 없는 그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으며 새로운 페이지들을 펼칠 수 있었다니… 오, 가까이 있는 자들이 내리는 재앙을 견디게 해 준 미지의 당신께, 몰라도 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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