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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나는 그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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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나는 그를 모른다

입력
2012.02.2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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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그늘이 많은 사람 나는 지금 그의 곁에 없지만

노트 겉장의 글씨처럼 아직도 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쓰고 천천히 읽는다

오후 세 시의 사랑은 오후 세 시에 끝나고

더운 물에 손을 씻는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이라도 읽을까 눈을 들어

강변으로 나 있는 송전선보다 빨리

나는 저녁의 그 집에 닿고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걸음걸이로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중략)

해바라기가 많은 그 집으로 이사를 하지요 그럼

당신의 아이를 서른 명 낳아 주겠어요

서른 명 서른 살

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낙엽을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

그는 그림 속에서 잠자고

그림 속에서 식사를 한다

그때 서른 살이 언덕 너머 멀리에 있을 때 그때

나는 왜 그곳을 지나갔을까

해바라기 씨앗이라도 사올까

씨앗만이라도

오후 세 시 전화로 끝나 버리는 사랑

나는 순결한 사각형으로 남아 있고

그의 여름 휴가는 어디에 가 있을까

강변으로 나 있는 의자에는 먼지가 쌓여 있다

서른 살

그는 아직 나를 모르고 해바라기는 불을 끈다

나는 이미 서른 살인 것이다

● 이십대를 무엇으로 버티셨는지? 전 스무 살엔 기형도의 시집을 들고 다녔고 그 뒤 서른 살까지는 쭉 최승자의 시집을 읽었던 것 같아요.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낙담했을 땐 고흐의 그림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는데. 기형도 시인은 사진으로만 보았고, 고흐는 오직 그가 그린 별밤과 해바라기들로만 만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서른 살이 언덕 너머 멀리에 있을 때, 알 수 없는 그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으며 새로운 페이지들을 펼칠 수 있었다니… 오, 가까이 있는 자들이 내리는 재앙을 견디게 해 준 미지의 당신께, 몰라도 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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