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우리 집은 만화방이었다. 만화가게집 아들이란 참 묘한 존재였다. 학교에서는 시시때때로 '만화 규탄 대회'가 열렸다. 불에 태우기도 했다. 어린이들의 건강한 정신을 좀 먹는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만화였다. 공부를 꽤 잘했던 나는 우리 집 생계 수단을 규탄하는 글을 써야 했다. 하지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무섭게 만화를 봤다. 친구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저 좋은 만화를 돈 한 푼 내지 않고 실컷 볼 수 있다니. 그러나 어머니는 곧 만화방을 접었다. 만화방 주인인 어머니조차 만화가 어린이들의 적이라는 말에 수긍했다. 그만큼 만화는 공공의 적이었다.
하지만 매달 나오던 월간지와 더불어 만화는 내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만화와 월간지를 읽으며 나는 밤마다 세계지도를 펼쳤다. 온갖 괴물들이 바다에서 뛰쳐나왔고 저 멀리 우주에서는 쉴 새 없이 UFO가 날아 왔다. 2000년 처음 영국 여행을 갔을 때 주저 없이 표를 사서 간 곳이 네스 호였다. 그곳에 가는 것은 나의 가장 큰 로망이었다. 국제연대운동을 하는 틈틈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문한 곳은 거의가 다 만화나 월간지에서 보며 꿈을 키운 곳이었다. 앙코르 와트며 마추피추도 그랬다. (언젠가 버뮤다 삼각지대를 꼭 갈 것이다.)
만화는 그 이후에도 내 삶의 일부였다. 대학입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고등학교 때 읽었던 은 1987년 6월 항쟁과 함께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에게 던졌다. 대학생일 때 자막도 없이 본 불법복제판 는 사상적인 충격이었다. 불이 아니라 바람, 생태와 공동체는 삶의 화두가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학생들과 큰 무리 없이 정서적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것도 만화 덕분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냉소주의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이말년이나 조석과 같은 속칭 '병맛 만화'들이다. 그럼에도 이 세대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나 가 인기몰이하는데서 알 수 있다. 일본 만화 는 아예 이번에 새로 낸 책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기까지 하다.
길게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24개에 달하는 포털 사이트의 웹툰을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문에 따르면 '전기통신회선을 통해 잔혹한 살상 또는 폭행 등의 장면을 자극적으로 묘사, 폭력을 조장하거나 미화해 청소년의 건전한 인격 형성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갑자기 왜 웹툰이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청소년의 적이 되어버렸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학교폭력 때문이다. 지금까지 학교폭력에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했던 어른들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누군가가 이 모든 죄를 덮어쓰고 자신들 대신 죽어야 했다. 웹툰이 지목됐다. 연일 보수 신문을 비롯해 웹툰이 얼마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지를 폭로하는 기사가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30년 전 어머니 가게를 지목했던 그 세력은 이번에도 웹툰을 팔아 면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유해매체'를 학생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이야기해봤다는 기사는 읽어본 적이 없다. 왜 그 만화들이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 교육과 사회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토론해 봤다는 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웹툰을 '유해매체'가 아니라 청소년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창'으로 여기는 교육자의 말도 본 적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서 그들은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요즘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세요? 젊게 사시나 봐요. 아뇨. 웹툰을 보거든요. 웹툰을 보세요.
늘 소통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소통이 아니라 몽둥이를 드는 당신, 웹툰이 아니라 웹툰을 볼 생각조차 않는 당신이 진짜 문제다. 교육이 등장해야 할 시간에 경찰을 들이대는 당신 말이다.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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