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이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는 국민의 신뢰다. 그 이상은 없다."
지난해 11월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주최 국제포럼에 참석한 그렉 다이크 전 BBC 사장이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모든 정치인은 언론에 영향을 끼치려 하고, 누가 집권을 하든지 방송을 손에 넣고 싶어한다"며 "이런 외압에 맞서 불편부당하고(impartial) 지적이며(intelligent) 용기 있는(brave) 자세를 갖고 공정성을 지킬 때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방송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양대 공영방송 동시파업이란 초유의 사태를 눈앞에 둔 KBS와 MBC의 현실은, 너무도 당연한 이 말들을 새삼 곱씹게 한다. 20일로 총파업 22일째를 맞는 MBC 노조, 17일부터 파업 찬반투표에 돌입한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 모두 '공정성 복원과 사장 퇴진'을 파업 목적으로 내세웠다. "이제껏 뭐 하고 정권이 힘을 잃은 말기에야 나서느냐"는 비아냥도 없지 않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끝장 투쟁'에 나선 이들에게서 이대로 가다가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기회마저 영영 잃게 되리라는 절박함을 읽을 수 있다.
파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정성 복원이겠지만 이는 하루아침에 보여줄 수 있게 아니라 향후 방송을 통해 이뤄 가야 할 중장기 과제다. 결국 가시적 목표는 사장 퇴진인 셈이다. 정권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의 '낙하산 사장'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명박 정권의 행태는 가히 점령군에 가까웠다. 그렇게 자리를 꿰찬 사장들은 정권의 뜻을 충실히 받들었다. 김재철 MBC 사장의 첫 과업은, 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장의 말을 빌리자면, "큰집에 불려가 '쪼인트' 까"이며 "MBC 좌파 70~80%를 정리하는 대청소의 청소부" 노릇이었다. 그 후 보도ㆍ시사 프로그램의 취재 아이템 검열, 항변하는 이들에 대한 보복 인사가 뒤따랐다. 김인규 KBS 사장 역시 민감한 사회 문제를 다루는 시사 프로그램 축소ㆍ폐지, 안팎의 비판에 대한 줄소송 대응, 민주당 대표실 도청의혹 깔아뭉개기 등으로 일관해 왔다. 이들이 공영방송을 철저히 망가뜨렸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양 김씨만 몰아내면 KBS와 MBC가 공정한 방송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누가 되든 낙하산 논란을 피할 수 없고 결국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현행 방송법상 KBS 사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임명제청권을 가진 KBS 이사회 이사들(여당 몫 7명, 야당 몫 4명) 역시 방송통신위원회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게다가 방통위 상임위원 5명(위원장 포함 2명 대통령 지명, 여당 추천 1명, 야당 추천 2명)의 임명권도 대통령에게 있다. MBC 사장은 방문진에서 임명하지만, 방문진 이사(여당 몫 6명, 야당 몫 3명)는 방통위에서 임명권을 행사한다. 먹이사슬처럼 얽힌 구조의 맨 위에 대통령이 있고, 방통위와 KBS 이사회, 방문진도 여당 측 인사가 과반을 차지한다. 결국 양 사의 사장 선임은 물론이거니와 방송사 경영, 나아가 주요 방송정책 전반을 청와대와 여당의 입맛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구조다. 김우룡 전 이사장의 "쪼인트" 발언이나 지난해 스스로 사표를 낸 김재철 사장을 방문진이 재신임 한 촌극, 경영 감시 기능을 상실한 KBS 이사회의 현실 등은 모두 이런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KBS와 MBC 노조가 궁극적 목적인 공정성 복원, 국민의 신뢰 회복을 실현하려면 사장 퇴진 투쟁에 그치지 않고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바꾸는 법 개정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들의 파업 행보를 지지하는 단체나 개인들도 법 개정에 힘을 실어야 한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대선에서 'MB 정권 심판'이 이뤄진다 해도 선 자리만 바뀐 채 똑같은 논란과 갈등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이 고리를 끊어 내려면 사람만이 아니라 제도를 바꿔야 한다.
이희정 문화부장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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