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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장애인들과 농사짓고 사는 임락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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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장애인들과 농사짓고 사는 임락경 목사

입력
2012.02.1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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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락경(67) 목사는 직업이 농부라고 했다. 그의 집으로 모여드는 장애인들을 거둬야겠고 거두자니 복지시설이 되어야겠으나 법인을 만들 돈은 없어서 선교단체로 하면 될 것 같아서 마흔이 넘어 목사 자격증을 땄다. 1945년 전남 순창에서 태어나 유등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공식학력의 전부. 교회의 속성 학위과정을 거쳐 비인가 신학원에서 목사가 되었으니 교파를 묻는 이들에게는 '대한예수팔아 장사해'라고 답한다. 거대교회를 만든 적 없고 장애인을 거두면서도 정부지원조차 거절한 그였으니 종교 팔아 장사하는 교회에 대한 통렬한 농담인 셈. 지금도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3리에서 17명이 농사지어서 된장 간장 만들고 양봉하며 살고 있다. 한때 시골교회라고 불렸으나 이제는 '시골집'이라고 불리는 농촌공동체. 공동체운동에 열심인 청년들이 합류하면서 임 목사는 병 없이 잘 사는 법에 대한 외부 강연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이제는 아무 것도 안 하니까 나 같은 사람한테 들을 이야기가 뭐가 있어"하면서도 더 나은 세상에 대해 뼈있는 농담을 계속했다.

­­_시골집에 장애인은 몇 명인가요?

"2004년엔가 김근태씨가 복지부 장관이 되면서 전국에 있는 미인가 시설에 대한 조사를 했어요. 장애인 가두고 죽게도 하니까 없앨 곳은 없애고 제대로 하는 시설은 인가를 내주고 1억~3억원 정도의 시설지원자금도 주려고. 우리집에도 공무원이 찾아와서 질문을 하는 거야. 여기 장애인이 몇 명이고 사무직이 몇 명이냐, 그래서 내가 모른다고 했더니 다시 원장하고 총무한테는 임금지원도 나오니까 목사님 같은 직원이 몇 명이고 장애인이 몇 명이냐고 묻는다,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제 정신 갖고는 못하니까 내가 1급지체다 그랬지요. 2005년엔가 장애인복지시설로 인가를 받았는데 시설지원금은 받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때 다른 복지시설에서 하는 걸 보니까 다들 자기 규모보다 더 크게 잡아요. 100명이면 120명, 120명이면 150명 그래요. 그렇게 짓고나니 장애인이 모자라요. 그러니까 다들 보내달래. 중증장애인은 정부에서 지원도 더 많이 주니까 중증장애인부터 달래요. 그래서 IMF때는 45명까지도 있었는데 전부 빠져나갔어요. 인가도 3년만에 반납했어요. 지금은 가족이 있어서 정부 지원은 못 받으면서 가족도 지원 안하는 사람이 주로 남았어요. 불 내고 똥싸고, 가게 들어가서 물건 가져오고,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아버지가 회사 가야 해서... 돈 내는 가족도 있고, 안내는 가족도 있고, 그 구분은 없어. 그냥 똑같이 사니까. 쌀 좀더 넣고 난방 더 넣고 붙여가며 살아요. 하나님이 원래 10명 중 한 명은 다른 사람한테 쓰라고 보냈대. 성직자한테 쓰라고가 아니라. 그리고 장애인은 사고 내봤자 유리 한 장 깨고 똥 좀 싸는 거지 큰 사건은 건강한 사람이 내요. 차를 꼴아박는달지 나처럼 보증 잘못 선달지, 연말에 결산해보면 그래요. 그러니까 구별하면 안되고 구별할 필요도 없어요."

_언제부터 이렇게 살게 되었어요?

"지금 이곳에서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된 것은 1980년부터였어요. 제가 농사를 짓는 곳으로 사람들이 오니까 함께 살았어요. 원래 태어난 곳은 전북 순창이지.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집안인데 초등학교 4학년 때 곱셈 나눗셈을 배우다보니까 사람이 백살까지 산다고 해도 3만6,500날 밖에 못 사는 거야. 보통 70살이라고 하면 내가 그때가 열살이니까 이제 2만날쯤 남았다 싶으니까 뭘 하고 살아야 하나 고민이 됐지. 공무원은 없어도 되겠고 목사님도 없는 게 낫겠더라고. 그런데 농부가 없으면 사람들이 살 수가 없겠어요. 그래서 농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중학교를 가지 않고 스승을 찾아다녔어요. (무교회주의자들 사이에) 존경받는 다석 유명모(1890~1981) 선생이 '북에는 남강 이승훈이 있고 남에는 이현필이 있다' 그랬다기에 이현필(1913~1964) 선생이 폐결핵환자들과 사는 전남 화순의 동광원이라는 곳으로 열여섯 살에 찾아갔어요. 거기에 유영모 선생도 계시고 훌륭한 분들이 많았어요. 그분들이 하시는 일 돕고 농사짓다가 스물 둘에 군대를 온 게 여기 화천이었어요. 군대 나와서 다른 데서 농촌운동 하다가 여기 정착했지요."

_그럼 공부는 영영 안하시고요?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뿐이지 공부야 계속 했지요. 동광원에서 훌륭한 분들 모시고 살았으니 거기서 듣는 이야기도 있고 오셔서 강의해주는 분들도 많았어요. 조카들이 다쓰고 버리는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가져다 다 봤어요. 시험 안 보고 외우라고 안 하니까 6개월이면 다 봐요. 사람이 공부는 계속 해야 해.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팔만대장경 사서삼경 노자 장자는 몇 번씩 읽었어요. 공부 중에 제일 큰 공부는 자연한테 배우는 거야. 물 찾는 법, 산맥과 터 잡는 법, 건강하게 사는 법, 이런 거 사람들한테 배운 걸 두고 자연을 잘 살피다 보면 어느 순간 원리를 깨치게 돼요. 농사짓는 법만 평생 익혔는데도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 상지대 총장으로 가시면서 국제환경유기농센터를 만들었는데 거기 교수로 임명했어. 경기도 정상묵 전라도 강대인 충청도 주형로 경상도 최준혁 등 유기농 운동하던 사람들이 다같이 됐는데 다른 사람은 고등학교는 나왔는데 초등학교만 나오고 교수된 사람은 나 하나예요. 그 전부터 크리스찬아카데미나 기독교농촌개발원 수원교구청 교육도 다했어요."

_다석 유명모 선생을 따르는 이들은 하루에 네 시간만 자고 밥 두 끼 먹고 아침에 깨면 독서하는 습관으로 유명하던데요.

"잠은 환갑 때까지 네 시간만 잤어요. 요즘은 다섯 시간은 자요. 자시(밤11시~새벽 1시)에만 잠들면 네 시간만 자도 생활에 지장이 없어요. 그런데 하루 두 끼는 아니야. 젊을 때 새벽 네 시에 벼타작을 하러 가면 다섯 시에 아침 참을 줘요. 그걸 안 먹고 지게를 지니까 다리가 안 펴져. 그래서 내가 두 끼 먹으라는 말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소리라는 걸 알았어. 일하는 사람은 하루 세끼 먹어야 돼요."

_다석 선생의 모든 말씀이 완벽하다는 건 아니군요.

"사람을 너무 미화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사람은 조금 게으르면 짐승같이 될 수 있고 조금만 노력하면 천사같이 보일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사람을 성인처럼 대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1995년 크리스마스에 장기려 박사가 돌아가셔서 신문에 크게 난 날, 다석 선생을 아는 이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장기려 박사가 제일 훌륭하다' 그랬더니 왜 유영모 선생이 아니냐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앉아서 고상한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더니 제자들을 많이 키우지 않았느냐 그래서 '제자들도 생각만 많이 한다'고 했어요.(웃음)"

_실천만이 중요하다, 그 말씀이네요.

"몸으로 아는 것이 중요해요. 노숙자 문제도 그래요. 일본 노숙자는 부락민이에요. 신분차별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취직도 못해. 미국 노숙자는 군대 체험자야. 군대 가서 사람 죽인 경험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술로도 잊을 수가 없고 마약으로도 잊을 수가 없고 그래서 맨 정신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나라 노숙자들은 몸을 안 쓰고 성장한 사람들이야. 군대 가서 강연하면 군대 오기 전에 세탁소 한 사람, 미장원 한 사람 손들어보라 그러면 예전에는 손을 들어요. 그런데 요즘은 하나도 없어. 컴퓨터 해본 사람 있냐 그러면 전부 손 들어. 그런데 사회에서 컴퓨터 하는 사람 두 세명이면 돼. 그러니까 전부 실직자가 되는 거야. 인력시장이 열리면 막노동을 해야 하는데 무안의 양파가 30킬로야. 어려서부터 무거운 걸 들어본 사람은 무거운 걸 들 때 허리에 자동으로 힘이 들어가서 문제가 없어. 안 해 본 사람은 매번 허리 조심해라 주의를 줄 수가 없으니까 한번 들다가 삐끗하면 다쳐. 서울역 노숙자들이 일하러 안가는 게 아니에요. 시멘트 한 포대면 40킬론데 그걸 못 드니까 일을 못해요. 무안 인력시장에 가면 하루 일당이 최저 7만5,000원이에요. 그런데도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딸을 넷 키우면서 스무살 되기 전에 시멘트 한 포는 들게 가르쳤어. 우리집 지을 때 서까래를 우리 딸들이 들어다 올린 거야."

_몸쓰는 공부를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머리쓰는 것과 몸쓰는 노동이 똑같이 대접 받아야 해요. 사람마다 일 체질, 머리 체질이 있어서 머리 체질만 머리 쓰게 하면 되거든. 힘쓰는 사람이나 머리 쓰는 사람이나 똑 같은 대우를 해주면 누가 꼭 머리를 쓰려고 하겠어요."

_힘든 시기도 있었지요? 기도하면 기막히게 딱딱 맞춰 도움이 오더라 이런 말들도 하는데.

"내가 태어날 때 호흡기가 잘못 태어났어. 그래서 기도가 약해.(웃음) 기도하면 이뤄지지. 그런데 그런 기도는 내 뜻이지 하나님 뜻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간구기도는 안 해요. 회개와 감사는 매일 하지요. 딱 한번 간구기도를 한 적이 있어요. 이 동네에 와서 땅도 없고 집도 없으니까 아무 것도 못하겠는거라. 그래서 하나님한테 땅 3,000평하고 집 한 채를 달라고 기도했어. 그런데 저녁에 생각해보니까 '마음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 성경에 있거든. 그래서 '땅 달라는 기도는 취소합니다. 마음만 온유하게 해주십시오' 그랬어. 그래?땅이 만 평 이 만평이 됐어. 만일 그 기도가 이뤄졌으며 땅 3,000평이 됐을텐데 기도 취소한 덕분에 땅이 많게 됐어.(웃음)"

_집터 봐주고 수맥 찾아주고 건강법 가르치는 것 보면 보통 목사님들하고는 많이 달라요.

"주지스님이 돈 모아서 절 크게 짓는다면 탁발승은 돌아다니면서 병 고쳐주고 집집마다 어려움 해결해주는 사람이에요. 유교에서 양반하고 선비가 딱 그래요. 선비 중에도 동네서 살지 않고 돌아다니는 길선비를 도사(道士)라고 하는데 이 분들은 더 거침없이 양반을 비판할 수 있지만 동네에 안 살기 때문에 유전병 같은 동네 사정은 선비만큼 몰라요. 결혼 안하고 가족 없는 신부님들이 길선비라면 목사들은 선비쯤 되는 거지요. 원래 불교의 국사나 천주교 대주교가 드는 지팡이가 모두 수맥을 잡는 버드나무 방망이에서 온 거예요. 성직자가 하는 일이 본래 사람들이 근심하지 않고 밥 잘먹고 잠 잘자고 일생을 편안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이 잘못 먹고 있는 것을 고쳐주고 수맥이 있는 곳에 집 짓지 않도록 도와주는 건 목사 일이에요."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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