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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사람/ '007 제임스 본드의 살인면허' 실제 있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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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사람/ '007 제임스 본드의 살인면허' 실제 있다? 없다?

입력
2012.02.1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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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플레밍 원작의 첩보물 '007시리즈'를 보면 영국 첩보원 제임스 본드는 정부가 보증한 살인면허(licence to kill)를 갖고 있다. 작전 중 사람을 죽여도 기소되지 않는 초법적 면책 특권이다. 본드를 뜻하는 코드네임인 007에 붙는 00이라는 숫자 자체가 살인면허의 인증 번호다. 플레밍의 원작에서 본드는 무려 38명의 적을 사살했지만, 이 면허 덕분에 처벌 받지 않았다.

플레밍의 소설과 영화 때문에 영국의 첩보원은 아무 데서나 총을 쏘고 다니는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본드가 속한 영국 해외정보국(MI6)은 "살인면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을 취해 왔다. MI6 국장을 지낸 리처드 디어러브 경은 "MI6 요원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며 "암살은 영국 정부의 정책이 아니다"고 못박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영국에서는 영화에서만 가능할 줄 알았던 살인면허가 사실상 법적으로 첩보원들에게 보장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을 빚고 있다. 14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정보활동법' 제7조는 '장관의 승인을 받은 경우 외국에서 발생한 행위와 관련해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가디언은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도청이나 뇌물 제공뿐 아니라 살인, 납치, 고문과 같은 불법행위도 포함한다고 해석했다. 법 조항이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명시하지 않았지만, 경우에 따라 이 면책 조항이 살인면허로도 이용되고 납치면허, 고문면허 등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법의 존재가 부각된 계기는 무아마르 카다피 집권 시절 리비아에서 발생한 납치사건이 최근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004년 납치돼 트리폴리로 압송된 반정부운동가 가족들이 "영국 MI6가 납치 사건에 연루됐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경찰이 관련 수사에 착수하자, 한 정부 관계자가 "이 작전은 장관 승인을 받은 활동"이라고 언급한 것이 발단이다. 이 발언으로 첩보원 범죄를 면책하는 정보활동법 조항이 주목 받게 된 것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이 법적으로 이 특권을 인정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영화 007시리즈의 16탄인 '살인면허'의 개봉(1989년)보다도 5년 늦은 94년에 법제화했다. 과거 영국 정부는 비밀 첩보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당연히 첩보원의 형사적 책임 한계를 규정할 법 조항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첩보원이 작전에 실패해 외국 정부에 체포되면 "영국 정부는 아는 바 없고 해당 인물은 영국 정부 소속이 아니다"고 부인하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영국 정부는 007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MI6의 존재조차 94년에야 공식 인정했다.

비밀 정보기관과 조직원의 존재를 부인하는 영국의 전통은 80년대 국내외에서 잇달아 첩보원의 도청 사실이 발각되며 위기를 맞았다. 여기에 유럽인권위원회가 유럽연합(당시 유럽공동체) 회원국 정부에 "정보기관의 존재를 법으로 명시해야 한다"며 권고한 것도 영국 정부가 입장을 바꾼 배경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정부가 정보기관을 법에 명시하면서 소속원인 첩보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첩보원의 비밀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면책 조항을 신설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 때 하원은 첩보원이 해외에서 도청, 협박, 불법 침입을 하는 행위 정도에서만 면책을 주자는 취지로 이 법을 이해했고, 법안 통과 당시에도 큰 논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디언은 MI6가 이 조항을 보다 광범위하게 해석해 왔다고 전했다. 실제 이 조항을 활용하는 사례가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급증, 2009년에만 MI6가 장관에게 작전 승인을 요청한 건수가 500회에 달했다. 비밀을 생명으로 여기는 정보기관 특성상 MI6가 어떤 비밀 작전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문, 납치, 살인 등 불법행위가 이뤄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보기관 역사에 정통한 사가들은 과거 MI6가 공공연하게 해외 요인 암살을 일삼았다고 주장한다. 61년 당시 MI6 부국장 조지 케네디 영이 국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이란 인사에 대한 살해 지시를 내린 적도 있다.

정보기관 권한과 한계를 규정하는 정보활동법이 어떤 경우에도 고문, 납치, 살인을 금지한 형법 체계보다 우선할 수 있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MI6를 상대로 소송을 낸 리비아 납치 인사 가족 측의 사프나 말릭 변호사는 "우리가 볼 때 정보활동법은 인권법이나 국제형사법원법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영국 정부는 정보활동법이 다른 법에 비해 예외적 우선순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경찰 수사나 민사소송 결과에 따라 이 법은 폐기되거나 수정될 수도 있을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MI6 요원들은 본드와는 달리 살인면허를 반납하고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무면허 첩보활동'을 해야 할 지 모른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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