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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어떤 送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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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어떤 送辭

입력
2012.02.1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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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들 졸업 축하드립니다.

후배의 입장에서, 졸업을 상상하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두렵습니다. 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창의적 소수라 규정지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왕좌왕하던 신입생 시절, 선배님들의 다양한 작업들을 좇아서 모두 보러 다닌 적이 있습니다.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잘하나 싶어서요. 선배님들은 우리에게 어떤 치열한 고민의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수상한 일이나 유명해진 것도 물론이지만, 더 심오한 거 말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것도 없으면서 힘자랑 하는 거라든가, 찌질함을 인정하는 용기라든가, 스스로를 파괴하면서도 끝 간 데 없이 나아가는 멘탈 붕괴를 끝끝내 헤쳐 나오는 지혜 말입니다. 별 거 없는 것 같은데, 근데 그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졸업을 해 낸다는 것. 졸업은 내가 가장 열정적이었던 시기를 떠나보낸다는 뜻이고, 또 선배님들 각자가 지닌 결핍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을, 뭐를 통해서건 어느 정도 세상에 내보일 준비를 한다는 뜻이니까요. 성숙이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에게는 아직도 두려운 일인데, 의연하게 학사모를 쓰고 있는 선배님들의 밝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벅차오르고 자랑스럽습니다. 또 이렇게 후배들에게 멋진 모습 보여주시는군요.

지난 해, 우리는 학우들의 잇따른 죽음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그 죽음에 딱지를 붙였습니다. '냉소주의' 때문이라고 합니다. 2009년, 학생들이 정치적 행동을 강요당한 '한예종 사태' 이후 학교 내부의 분위기가 경직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저는 추모식장에 불던 바람에서, 그들을 몰랐던 이들도 저마다 이 일에 대한 부채감을 느끼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죽음의 사유를 어느 정도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학교에서 우리들은 세상과 동떨어진 채, 취하듯이 서로를 탐닉하고 경멸하고 사랑하며 함께 젊음의 시간을 보냅니다. 특별히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함께 모여 있으면 더 예민해집니다. 고된 작업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정의하느라 심신이 지치고, 심신이 지치면 외롭습니다. 거기에다가 고통을 파고드는 예술가적 기질이 더해집니다. 우리는 각자의 결핍에 파고듭니다. 결핍상태를 창조를 위한 당연한 조건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 상태가 너무 빈번해져서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결핍상태를 도외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매일 같은 식단으로 식사를 하고, 추위를 견디며 밤을 새고, 의심스러운 결과물을 확신해야 한다는, 그야말로 '예술의 교착 상태'에서의 험난한 인내의 시간을 세례받았지요.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외에도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계관을 성숙하는 과정에서 너무나도 각자의 인생을 살지만, 삶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미친 듯한 몰입의 순간이 저마다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료로서 서로의 결핍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야 합니다. '나'를 넘어선 '우리의' 삶의 의미를 밝힐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을 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인간은 모두 조금씩은 죽음을 사랑하게 되는 숙명을 타고났습니다. 하지만 선배님. 우리에게는 동료가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사랑한다는 증거이니까요. 저는 학교에서 선배님, 동기, 후배님, 선생님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과정이라는 것, 삶이라는 여행의 일부라는 것도 압니다.

먼저 간 그들은 영원히 졸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는 더욱 의미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에서 우리의 사랑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잃어버린 희망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졸업'과 그 이후의 시간입니다.

용 쓰셨습니다. 선배님들 뒷받침하는 후배님들, 졸업하느라 아등바등한 시간 보낸 선배님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 졸업시키느라 수고하신 선생님들도 모두, 용 쓰셨습니다.

본격적인 세상과의 조우가 만선의 희망을 안고 순풍에 돛을 활짝 펼치는 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근 열린 서울의 한 예술대학 학위수여식 때 재학생이 낭송한 송사 전문입니다. 고난한 시대 청춘과 예술, 그리고 현실의 차갑고 높은 벽이 이 겨울을 더욱 차갑게 합니다. 학생의 승낙을 얻었음을 밝혀둡니다.

박근형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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