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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한동네 이웃일까? 미궁에 빠진 '농약 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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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한동네 이웃일까? 미궁에 빠진 '농약 비빔밥'

입력
2012.02.1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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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당 쌀밥서 독극물 검출과실아닌 고의 범행에 무게감주민들 서로 의심의 눈초리문걸어 잠그고 외출마저 자제경찰 수사 제자리 걸음 답답

15일 오후 전남 함평군 월야면 내정마을. 사람 발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마을이 너무 조용해 적막감만 느꼈다. 부촌이라 그런지, 마을은 깨끗했다. 하지만 여느 농촌마을과 달리 집집마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마을 골목길을 이리저리 누빈지 1시간이 지났어도 돌아다니는 주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간혹 몇몇 집들은 자물쇠가 잠겨 있었고, 문틈으로 우편물들이 끼어 있는 것으로 봐서 오랫동안 출입이 없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더욱이 마을 가운데 있는 노인정에는 농한기인데도 인적은 전혀 없고, '수사 중 접근금지'라고 적힌 빛 바랜 폴리스라인만 너풀거리고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순천의 청산가리 막걸리'에 이어 '함평 농약비빔밥' 사건이 발생한지 40일. 온기가 넘쳐야 할 마을은 적막공산과 다를 게 없었다.

지난달 5일 오후5시45분쯤 마을노인정에 모여 비빔밥을 먹던 주민 6명이 갑자기 거품을 몰고 복통을 호소하다가 쓰러졌다. 광주병원으로 옮겼으나 정모(72ㆍ여)씨가 숨지고, 이모(57)씨 등 5명은 사경을 헤매다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주민들은 경로당에 있던 흰 밥에 각자 상추 등 반찬을 가져와 비빔밥을 만들어 먹다가 변을 당했다.

사건 초기 경찰은 과실로 보는 빛이 역력했다. 함평경찰서 관계자는 "누가 일부러 농약을 넣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런 유사한 사건 다른 곳에서 여러 건 일어났지만 다 과실로 확인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농약을 조미료로 잘못 알고 비벼 먹은 걸로 본 것이다.

하지만 정 할머니가 숨진 지 열흘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결과가 나오자 경찰 수사가 180도로 변했다. 주민들이 가져온 비빔밥 재료인 상추겉절이, 간장, 고춧잎 등에서는 농약성분이 나오지 않았지만 노인정에서 지은 흰 쌀밥에서만 맹독성 살충제 농약 '메소밀'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이봉현(76) 내정마을 노인회장은 "지금까지 노인정 안에 단 한번도 농약병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며 "할머니들이 반찬을 만들면서 농약병과 조미료병 구별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누군가 고의로 농약을 넣지 않고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된 셈이다.

하지만 독살 의도를 염두에 두고 수사를 벌이고 있지만 진전이 없다. 경찰은 주민 20여명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여 농약을 구입한 주민들을 조사했지만 뚜렷한 혐의를 찾지 못했다. 숨진 정씨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주민도 조사했지만, 사소한 말 다툼을 했을 뿐 갈등이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주민은 처음에는 농약을 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가 나중에 구입한 기록이 나오자 진술을 번복해 혐의를 받기도 했지만 고령이라 기억이 오락가락 한 데 불과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무엇보다 메소밀 농약은 이 마을 농가들이 대부분 쓰지 않는 살충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목격자도 없고 주변에 폐쇄회로TV도 설치되지 않은 실정이라 경찰은 결정적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경찰의 유일한 단서는 경로당에 남겨졌던 흰 쌀밥. 경로당은 항상 열려 있어 아무나 출입이 가능하다. 그러니 경로당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소행일 것이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경찰 수사가 이처럼 미궁 속을 헤매다 보니 '도대체 누가 농약을 넣었는지'를 놓고 주민들 사이의 분란만 커지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내정마을은 집성촌으로 현재 25세대, 주민 45명이 살고 있다. 사건이 일어나지 전만해도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사건 이후 주민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바깥출입을 자제했고,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 일부가 경찰조사를 받으러 함평읍에 있는 경찰서로 나갈 때마다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한 주민은 "서로가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를 한 당께"라며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번 설에는 적막감이 더했다. 마을 사람들은 서울 등 외지에 나가 있는 아들 딸, 손주 등 가족 친지들도 오지 못하게 막았다. 마을 사람들간 왕래도 자연히 끊겼다. 김모(77)할머니는 "건넛집 두 할머니들은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으러 목포까지 다녀왔어. 속상한 사람들을 불러다 뭐 하는 일인지"라며 "사람 사는 곳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민 A씨는 "숨진 정씨의 남편은 부자고 나이도 많은데 뭐가 아쉬워 마누라를 죽이겠냐"며 "마음도 아픈데 날마다 경찰조사를 받으면서 죽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하더라"고 말했다. 또 다른 마을사람은 "날마다 가족들의 안부전화에 마을 주민들 몇몇은 마을을 아예 떠나고 싶어한다"며 "걱정이 없던 부자마을이 서서히 폐허가 되어 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의심이 의심을 낳다 보니 마을사람들도 아주 친한 이가 아니면 접촉을 꺼리는 실정이다. 비빔밥을 먹고 살아난 정모(57ㆍ여)씨는 "사고를 당한 주민들끼리만 만나고 있다"며 울먹였다.

마을은 풍비박산이 나고 있지만 제자리 걸음인 경찰수사가 진척을 낼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경찰인사로 담당 수사과장도 바뀌었고 경찰 2,3명이 이틀에 한번 꼴로 탐문수사를 벌이는 게 고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함평서 관계자는 "용의자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며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함평=박경우기자 gw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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