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인 여동생을 따라 필리핀의 한 섬에서 연말 휴가를 보낸 적이 있다. 공짜 비행기 티켓인데다 동생이 머무르는 호텔에서 꼽사리로 먹고 자는 패키지라 부랴부랴 짐을 꾸려 도착하니 웬걸, 작은 바닷가 마을에 영어와 타갈로그어로 된 간판들 사이 비죽비죽 한글이 읽히는 거 아닌가.
누구네 조개구이며 노래방이며 삼겹살이라는 글자들이 예가 한국의 어촌인가 싶게 순식간에 우리를 질펀한 우리네 밤의 술상에 불러다 앉히는 듯했다. 역시나 대단한 한국인들이라니까. 이곳까지 고기구이용 숯불을 침투시킨 놀라운 생활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했던 건 가게 곳곳에 붉은 래커로 갈겨져 있던 어떤 분노의 표출 때문이기도 했다.
대체, 누가, 왜, 라고 하기에 지레 발이 저리는 이 느낌은 뭐람. 일거리가 없으면 방구석 시체가 되는 우리와 달리 반바지에 맨 웃통 차림으로 하릴없이 집 앞을 서성대던 그들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허연 이를 드러내며 잘도 웃었다. 타고난 특유의 낙천으로 가난을 오래 견뎌온 사람들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못 배우고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닐 터.
현지 가이드의 말을 빌자니 특히나 술이 취해 벌이는 한국인들의 추태와 무시가 젤로 심하다나. 돈 뿌리러 왔으니 제 돈 뿌려가며 왕 노릇 하는 걸 어쩌겠냐만 그런 몇몇의 헤픈 짓거리로 스노 쿨링이나 즐기려는 소박한 우리들이 납치의 표적이 된다는 건 해도 너무 한 일, 그렇게나 억울한 일.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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