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아웃에 도전한 우리의 겨울/ 수잔 모샤트 지음ㆍ안진환 등 옮김/민음인 발행ㆍ412쪽ㆍ1만6000원
고등학생 남자 아이를 둔 집에서 놀랄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거실 한쪽에 있던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가 어느 날 무참히 깨져 있는 거다. 무언가에 잘못 부딪혀 모니터가 깨지는 경우도 드물거니와, 브라운관 모니터였으니 그 무거운 물건이 책상 아래로 굴렀을 리도 없고. 알고 보니 모니터는 그 집 어머니가 망치로 내리쳐 박살낸 것이었다.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아이를 통제하려고 책상까지 거실로 옮겼건만 여전히 게임에 빠져있는 아이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인터넷선 차단을 몇 차례 시도한 끝에 내린 결론은 가정의 평화와 아이의 미래를 해치는 이 '괴물'에 대한 즉결 처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탄해마지 않는 인터넷을 비롯해 구글, 아이폰 그리고 페이스북 등 21세기 문명의 이기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책이 그리 드문 건 아니다. 이런 책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세기를 연 이 컴퓨터 기반 기술들이 또 다른 소외나 범죄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21세기 문명의 이기와 단절해 살아본 경험을 담은 책도 더러 있다.
<로그아웃에 도전한 우리의 겨울> 역시 디지털 없이 살아보기 체험담이다. 색다른 것은 그 체험을 저자 혼자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50대 초반의 저자는 자신의 세 아이를 집에 있는 모든 플러그를 뽑아 버리는 이 실험에 동참시켰다. 아이들은 놀랍게도 모두 '10대'였다. 로그아웃에>
큰 딸 애니(18), 아들 빌(15), 막내 수지(14). 밥은 굶어도 아이폰이나 페이스북은 해야 하고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사는 'M세대'(1980년대 초반 이후 출생한 모바일 세대)였다. 모두 집에 있을 때도 거실에 모여 앉는 일이 없다. 각자 제방에 앉아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빌은 숙제에 필요하다며 마련해 놓은 고성능 그래픽카드가 달린 높은 사양의 컴퓨터로 게임에 매달려 있다. 수지는 잠을 아껴 가며 문자질과 TV 보기에 빠져 있다. 집안은 그냥 두면 사막이고, 엄마가 이런 상황에 열을 내기 시작하면 전장이 된다.
그래서 저자는 집안의 모든 플러그를 뽑고 살아 보기로 결심한다. 컴퓨터와 아이팟, TV, 게임기는 물론 자신의 아이폰마저 싹 치워버렸다. 물론 아이들이 호락호락할 리 없다. 자신이 어릴 때보다 지금 아이들은 훨씬 집안에서 상전 행세한다고 느끼는 저자는, 약간의 충격요법을 도입했다. 늘 하듯 설득이나 타협이 아니라 실험 실시를 선포한 것이다. 물론 6개월간의 실험을 마치고 책을 쓸 건데 그게 잘 팔리면 보수를 지급하겠다는 '당근'도 빼놓지 않았다.
집안에서 디지털 기기가 사라진 첫 날 엄마는 MTV의 왁자지껄한 소리도, 슈팅 게임의 고사포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선(禪) 수행 도장이라도 된 듯한 집에서 잠을 깨는 평화로움을 맛본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수지는 당장 반기를 들고 자신의 전자제품을 꾸려서 친구 집에 가 버린다. 빌은 할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투덜댄다.
하지만 실험 개시 3주 만에 애니와 빌은 둘이서 정말 몇 년 만인지 모르게 영화관에 갔다. 그리고 빌은 장난감 벽장에서 오래 전 버려둔 색소폰을 찾아내 불기 시작했다. 빌이 조이스틱이나 마우스 없이 무언가를 조작하는 소리를 들은 게 얼마 만인지, 실험이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이것 하나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빌은 2년 전만 해도 매주 레슨을 받았고 음악가의 길을 걸을까 고민하던 소년이었지만 온라인 게임에 몰입하고 난 뒤 그런 생각이나 생활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집 나간 수지는 언니 오빠에게서 사태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다. 아침 일찍부터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하던 수지는 충분히 잠을 자면서 완전히 다른 아이로 변했다. 황량한 거실은 두 달 만에 말맞추기 게임과 색소폰 음악이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수지가 옛 앨범을 꺼내와 그것을 다같이 보며 웃고 떠드는 날도 있었다. 진정한 삶 속의 '페이스북'이었다.
책에는 이런 실험 과정을 소개하는 일기 형식의 글과 함께 칼럼니스트이자 호주 라디오방송의 독립 프로듀서로 일하는 미디어 전문가인 저자의 미디어에 대한 갖은 사색이 입담 좋게 펼쳐져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에서 영감을 얻어 이 실험을 계획한 저자는 미디어 기기들에 대해 느낀 점을 식기세척기에 대한 발견에 비유한다. 월든>
'오랜 세월 그것은 손으로 식기를 닦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라고 느껴졌었다. …그러나 시간과 노력, 결과물을 놓고 객관적으로 측정해 보았을 때, 그것은 그다지 나은 게 아니었다. 흰색보다 더 흰 소매와 깃을 창출하고자 하는 갈망처럼 지속적으로 접속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구는 기술이 해결해 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대체로 기술이 창조한 문제다. 정상, 효율, 적합, 안전에 관한 수없이 많은 기준은 우리의 기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가 떠올린 것은 '도구들의 도구'로 전락하지 말라는 소로의 경고다.
저자는 결코 디지털을 혐오하는 부류가 아니었으므로, 실험은 끝났고 아이들은 다시 디지털 세계로 돌아왔다. 디지털 단식 동안 많은 변화를 보였던 아이들이 그 이후 어찌 됐는지는 이 책만으로는 알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메일이나 문자나 구글이 없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그런 삶을 경험했고 거기서 좋은 변화를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게임에 빠진 아이 때문에 망치로 컴퓨터 모니터를 깨부술 정도로 분노를 느낀 적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좀더 세련된 대처법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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