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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경평(京平)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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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경평(京平)축구

입력
2012.02.1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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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서 틀을 갖춘 근대 축구가 한반도에 처음 전래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 6월이라는 게 정설이다. 제물포항에 입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 승무원들은 갑갑한 나머지 부두에 내려와 공을 찼다. 하지만 상륙허가를 받지 않은 탓에 조선 군졸에게 쫓겨 축구공을 놓아둔 채 승선해야 했다. 그들을 신기하게 지켜보던 아이들이 그 공을 주워 찼다. 그게 한반도 축구의 시축인 셈. 본격적인 축구 보급에는 선교사들의 공이 컸다. 그들의 도움으로 전국의 마을과 청년단체 등 친목회 단위에서 축구가 퍼져 나갔다.

■ 초창기에는 상투에 망건 쓰고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팀 당 15,6명씩 많게는 20명씩도 뛰었다고 한다. 제도권 차원의 정식 도입은 1904년 서울의 관립 외국어학교에서 체육과목으로 채택하면서부터다. 이듬해 6월10일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가 서울훈련원(옛 동대문운동장터)에서 공식 축구시합을 했다. 1921년에는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가 열렸다.

■ 축구가 민족적 스포츠로 관심과 열기가 높아진 계기는 서울과 평양의 경평(京平)전. 1929년 10월 조선일보 주최로 서울 휘문중학교(현대 계동사옥 자리)에서 1회 대회가 열렸고, 2회 대회는 1930년 경성운동장에서 사흘간 열렸다. 평양 팀은 체력으로 밀어붙이기에 강했고, 연희전문과 보성전문 선수들이 주축인 서울 팀은 전술 위주의 경기를 펼쳤다. 경기가 있는 날엔 시내가 거의 철시할 정도였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렸던 경평 축구는 1935년 4월 6차대회로 중단되고 말았다. 승부 집착과 지역감정 악화 탓이었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경평 축구 부활을 추진하고 나섰다. 15일 류우익 통일부장관을 만나 경평전과 서울시향의 평양 공연 등 서울시 차원의 대북교류 협조를 요청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5년 서울시장 시절 경평 축구 부활을 추진한 적 있다. 작금의 상황에 비춰 쉽지 않겠지만 비정치적 스포츠 교류가 성사돼 얼어붙은 남북관계에 해빙의 기운을 불어넣었으면 좋겠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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