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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응원을 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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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응원을 해야 하는 이유

입력
2012.02.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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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중요한 시험에서 마지막에 미끄러졌다. 여러 번에 걸친 실패의 기록을 뒤로 하고, 거의 마지막 관문까지 다가갔기에, 주위의 기대가 컸다. 하지만 기대와 반대로 당신은 면접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 긴장을 했을 것이다. 생각처럼 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언부언, 말의 꼬리가 길어졌을 것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결과에 마음이 깨질 것처럼 아프다.

수험생으로 맞이하는 봄이 또 한 차례 다시 반복된다. 당신은 슬프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쓴다. 살기 싫다. 살자. 힘들다. 힘내자. 포기하자. 한 번만 더 해보자. 속으로 천만 번 반복했을 것이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사회는 당신을 늘 시험에 들게 하고, 대부분 시험에 떨어뜨리며, 떨어짐을 비난한다. 시험이라는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심정의 당신.

1994년 월드컵에서 우리는 월드컵 첫승과 16강의 결과를 기대했다. 당시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와 한 조에 속한 우리는 조3위를 차지해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진출한다는 꽤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태극전사'들은 거대한 기대를 어깨에 걸치고 시험에 들었다. 스페인과 2대 2로 비기는 성과를 거두고, 만만하게 생각한 볼리비아와 일전에 들어갔다. 우리가 아는 볼리비아에 대한 정보는 그날 경기가 대부분이다. 황선홍은 수차례 시험에서 톡톡 털어지는 무능한 수험생이었다. 하석주는 경기 막판에 찾아온 결정적 기회를 허공에 날린 못난 젊은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비난했다. 이게 다 너희의 '개 발' 탓이야.

98년, 지역예선을 어느 때보다 쉽게 통과했다. 16강의 기대치는 에펠탑보다 높게 쌓였다. 멕시코와 만나서는 사상 처음 선취골을 넣고도 세 골을 내리 먹으며 깨졌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와 맞붙은 조별리그 2차전은 언급하고 싶지 않다. 한국 축구가 받은 가장 참혹한 성적표였다. 3차전 상대는 벨기에. 앞선 시험을 모두 망치고 감독까지 잃은 선수들은 상대방 발에 머리부터 들이미는 진짜 '붉은 악마'가 되었으니, 후발주자에게 밀린 원조 붉은 악마, 벨기에를 상대로 투혼의 무승부를 거둔다. 그리고 탈락. 우리는 그들을 비난했다(물론 이동국과 고종수는 청춘스타가 되어 있었다). 이게 다 차붐 탓이야.

2006년에도 시험은 이어졌다. 이미 우리 축구는 안방에서 세계적 우등생이 되었었다. 족집게과외도 받았고, 스파르타식 기숙학원도 다녔다.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한 훈련이 실전에서 빛을 발하며, 4강에 올랐다. 그래서 당연히, 2006년에는 최소한 16강은 기본이고, 8강은 가지 않겠는가 하며 또 기대했다. 한국인을 제외한 전 세계 월드컵 시청자가 수면에 빠지기 충분한 내용의 경기를 펼치며 1승 1무를 기록했고, 3차전에서 스위스에게 진다. 우리는 심판 탓, 외국인 감독 탓, 참 말도 많았다. 그리고 2010년에는 가까스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비오는 8강전에서 우루과이에게 졌고, 비난 받는 선수는 더 늘었다. 이게 다 수아레스... 아니, 이동국 탓이야.

시험 결과가 나오고, 당신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 멀지 않은 친척 어르신의 한마디. 준비를 똑바로 해야지 얼마나 느슨하게 시험을 치렀으면 면접에서 떨어지느냐. 느슨한 건 당신이야. 당신은 말하지 못한다. 죄송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죄송한가. 가장 괴로운 사람은 당신이고, 납득하기 힘든 사람도 당신이다. 누가 한순간 실수로 1년의 고생이 돌무더기가 된 사람에게 다시 짱돌을 던지는가. 당신은 잘못이 없다. 힘내라.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응원할 것이다. 설령 당신이 실패하더라도.

대표팀은 곧 쿠웨이트와 한판 붙는다. 지면 월드컵이라는 큰 시험에 응시할 자격조차 사라진다. 물론 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기대한다. 기대 속에서 묻는다. 우리는 축구를 사랑하는가? 우리의 사랑하는 것은 축구 자체인가, 월드컵 성적이라는 우리의 기대인가. 그들이 실패하더라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축구는 당신이 아니지만, 당신의 삶처럼 계속된다. 우리는 그들을 응원할 것이다. 기대하고, 사랑하니까.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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