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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벽지·백신까지 가격 조작… 공룡탐욕 도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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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벽지·백신까지 가격 조작… 공룡탐욕 도를 넘었다

입력
2012.02.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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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들 담합에도 앞장

2008년 7월 14일 서울 서대문경찰서 앞 한정식집. 보건소 인플루엔자 백신(독감 예방주사) 공급 계약을 앞두고 LG생명과학, SK케미칼, CJ제일제당 등 내로라하는 국내 백신 제조업체의 영업 담당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백신 공급 과잉으로 가격 하락이 예상되니, 개당 가격을 7,000원으로 유지하자"고 합의했다. 하지만 한 회사가 20% 이상 싼 5,499원에 입찰해 2005년부터 유지되던 담합은 깨졌다. 그러나 이 때뿐이었다. 이들은 2009년에 또 다시 모여 "작년에 못 거둔 이익을 올해 다 뽑자"며 개당 가격을 7,500원 이상으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들의 담합은 2010년 공정당국의 조사 직전까지 이어졌다.

재벌들의 담합은 공공재부터 말단 소비재에 이르기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지난해 적발된 담합 품목에는 청소년들이 주 고객인 온라인 음악, 주부들이 찾는 고추장이나 벽지는 물론, 경찰서에서 구매한 교통단속 카메라까지 온갖 제품이 망라돼 있다. 특히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독감 예방주사에까지 뻗친 탐욕의 손길은 재벌들이 과연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고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

담합은 해당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의 배신감에 그치지 않고 경제 전체를 좀먹는다. 2000년부터 시작된 SK에너지,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Oil 등 4개 정유사들의 주유소 나눠먹기 담합은 물가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전체 석유제품의 83%를 판매하는 주유소 유치경쟁을 하지 않음으로써 가격 경쟁이 벌어지지 않았고, 이는 결국 가격 인하를 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예컨대 SK주유소 업주가 가격이 싼 GS칼텍스로 바꾸려고 해도 GS칼텍스에서 석유제품을 팔지 않아 소비자의 선택권은 원천 봉쇄됐다. 4개 정유사들이 담합기간 올린 관련 매출은 81조6,683억원으로 소비자 피해(15%)는 12조2,502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담합은 시장경제의 기본인 경쟁도 가로 막는다. CJ헬로비전, 티브로드홀딩스(태광 계열), HCN(현대백화점 계열) 등 종합유선방송사업자(MSO)는 2008년 유료방송시장에 인터넷(IP) TV 사업자들이 진출하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방송 프로그램 공급자(PP)들이 MSO에만 프로그램을 공급하도록 이른바 '케이블 온리(Only)' 전략을 추진했다. 그런데 온미디어가 IP TV에 프로그램을 공급키로 하자 케이블방송에서 온미디어 채널을 20% 안팎으로 축소하는 등 제재를 가했다. 이 때문에 온미디어는 시청자가 900만명이나 줄었고, 시청자들은 보고 싶은 채널을 보지 못하게 됐다.

문제는 이미 시장을 장악한 공룡들의 횡포를 제재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담합 적발이 주업무인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조차 "대기업의 담합은 말기 암(癌)처럼 뿌리가 깊어 어디서부터 칼을 대야 할 지 막막하다"고 탄식할 정도다.

그렇다고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지능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대기업 담합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전문가들은 경제 활동 위축을 우려해 지금처럼 미미한 과징금을 부과하고 극히 일부 담합에서만 관계자를 고발하는 미온적인 조치로는 "개선이 요원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덕승 녹색소비자연대 대표는 "기업들에 담합하면 엄청난 손해를 본다는 인식을 강하게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담합으로 얻은 이익보다 더 많이 토해 내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손해배상 소송이 거론된다. 이 대표는 "미국 공정당국은 담합을 적발하면 행정조치 후 소속 변호사들을 동원해 소비자 피해에 대한 집단소송을 대리하게 한다"며 "우리나라도 소비자 스스로 소송하게 하는 것보다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기업들의 자정노력도 필수다. 아무리 '조직을 위해' 저지른 담합이라도 관련 임직원을 아예 업계에서 격리시키는 영국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 소비자가 나선다… 보험사·가전 등 상대 소송…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작년 말부터 "담합 피해를 막으려면 소비자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다. 리니언시 제도의 경우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담합 적발을 위해선 필요악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대신 정부가 입증한 대기업의 범법 행위를 근거로 소송을 통해 피해를 보상받는 게 유효하다는 설명이다.

실제 최근 소비자 단체들이 잇따라 재벌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서고 있다. 금융소비자연맹은 작년 말부터 생명보험사들의 상품 이자율 담합으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들을 모아 피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이다. 보험사의 담합으로 보험료가 올라가거나 만기 적립금이 줄어들어 17조원 이상의 소비자 피해가 발생했다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최근까지 약 1,000명이 소송 동참 의사를 밝혀 이달 중 법원에 소장을 낼 예정이다.

녹색소비자연대는 가전제품 가격을 담합한 삼성ㆍLG전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추진하고 있다. 담합 기간에 해당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가 소송비 2만원과 제품 영수증 등을 제출하면 이를 모아 소비자 1인당 제품값 부당 인상분과 정신적 위자료 50만원을 해당 기업에 청구할 예정이다.

공정위는 두 단체에 이례적으로 소송단 모집을 위한 광고비 명목으로 국가예산 1,000만~2,000만원씩을 지원했다. "기업에 과징금만 부과해서는 소비자 피해 구제에 한계가 있는데다 리니언시를 악용한 기업은 징벌 정도가 약해진 점도 고려했다"는 게 공정위 측의 설명이다.

이밖에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단체들도 지난해 공정위가 적발한 비료값 담합과 관련, 13개 비료업체를 상대로 지난 10년 간의 비료값 손해배상 및 위자료 청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처벌은 리니언시 통해 번번이 빠져나가

국내 세탁기, 평판TV, 노트북PC 시장의 90% 이상을 점하는 삼성전자와 LG전자는 2008~2009년 이들 제품의 가격을 담합한 혐의로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됐다. 이들에게 내려진 과징금은 삼성 258억1,400만원, LG 188억3,300만원 등 총 446억4,700만원. 하지만 실제 내는 돈은 129억원(삼성)에 불과할 전망이다.

비결은 담합 사실을 스스로 신고하면 과징금을 면제해주는 '리니언시' 제도에 있다. 1순위 자진신고자인 LG는 과징금 전액을, 2순위인 삼성은 절반을 감면 받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범죄를 공모했다는 사실은 물론, 담합에 참여한 모든 기업이 과징금을 면제받은 사례로도 화제가 됐다.

리니언시 제도는 구조적으로 은밀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담합 행위를 적발하는 데 효용성을 인정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이를 상습적으로 악용하면서 소수의 상습범에게 면죄부를 주는 부작용은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 LG전자는 삼성전자와 담합한 것을 세 번이나 자진 신고해 처벌을 면했다. 전체 담합 적발건수에서 리니언시를 거친 사건의 비율은 최근 5년 새 3배 가량(2005년 25.9%→2010년 72.0%) 급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담합을 주도한 대기업은 리니언시로 빠져나가고 중소기업들만 과징금을 무는 웃지 못할 상황도 생긴다. 뛰어난 정보력으로 공정위의 움직임을 미리 감지할 수 있는 대기업들이 리니언시의 단골 이용객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작년 2월 적발된 13개 전선업체 담합에서도 LS는 340억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 받았지만 1순위 자진신고자로 100% 면제받았다. 결국 넥상스코리아, 대원전선 등 중소기업만 수십 억원의 과징금 폭탄을 맞았다.

정부도 이런 불합리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공정위는 올해부터 리니언시로 과징금을 감면 받은 업체가 5년 안에 다시 담합하면 감면 혜택을 주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첫 번째 자진신고는 봐주고 두 번째는 안 봐준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적어도 담합을 주도하거나 담합을 통해 가장 이익을 많이 본 업체는 리니언시 대상에서 빼거나 감면 비율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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