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여행하는 이들에게 남한은 10만㎢가 채 되지 않는 도보여행지다. 그런데 겨울엔 걸을 수 있는 면적이 조금 넓어진다. 수도관이 얼어터지는 맹추위가 보름쯤 계속되고 나면 웬만한 강과 호수가 다 얼어붙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나라를 한 뼘이라도 더 밟아 보고자 하는 트레킹 마니아라면, 마땅히 이 계절이 가버리기 전에 행장을 꾸릴 일. 꽝꽝 얼어붙은 낙동강 상류 재산천으로 지인들과 얼음 트레킹을 다녀왔다.
'툭.툭.' 등산용 스틱으로 두드려본 얼음판의 소리가 둔탁하다. 여긴 밟아도 된다. '퉁-퉁-' 이렇게 맑은 소리가 나는 곳도 있다. 여길 밟았다간 119로 전화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눈으로 짐작되는 얼음의 두께와 실제 얼음의 강도는 별 상관이 없다. 탐침봉으로 지뢰 매설지를 조사하듯 일일이 두드려보는 수밖에 없다. 처음엔 번거롭고 겁도 나지만 하다 보면 재미있어진다. 멀리서 보면 심봉사 마실가는 모습 같다.
재산천은 경북 봉화군 재산면 동면리에서 발원해 명호면 삼동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여름철 잠깐 피서객이 끓는 곳이지만 찾아간 날은 고라니도 숨죽여야 할 만큼 고요했다. 출발부터 도착까지 마주친 사람의 흔적은 딱 하나였다. 약초꾼의 산막인 줄 알고 들어간 집. 꽉 닫은 문짝에서 나지막한 염불 소리가 새나왔다. 돌아나오며 열려 있던 사립문을 닫았다. 호박오가리 널린 문설주에 무상암(無相庵)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점심 먹고 출발해 다음날 점심까지 24시간의 트레킹. 거리로는 약 15㎞다. 땅바닥이면 세 시간 거리지만 얼음장 위에선 두세 배 잡아야 한다. 밤을 보내야 하니 동계용 비바크 장비는 필수다. 짐은 20㎏에 육박했다. 하지만 미끄러지고 미끄러뜨리며 노느라, 그게 시시해지면 저마다의 상념에 잠겨 걷느라 힘든 줄 몰랐다. '저엉-' 공포를 일으키던 깊은 곳의 얼음 갈라지는 소리도 적응되고 나니 그저 바람소리처럼 들렸다.
사람이 떠난 강변 폐가에서 밤을 보내고 다시 나선 길. 한두 시간 걷자 좁게 휘돌아 굽이를 이루던 재산천이 호수처럼 넓어졌다. 재산천의 끝부분인 명호면 소수력발전소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깊이가 10m는 되는 넓고 깊은 저수공간의 표면. 하지만 눈까지 쌓여 그저 너른 운동장의 한복판 같다. 끝에 다다랐다는 아쉬움에 얼음판 위에서 달리고 미끄러지고 부딪치며 당구공처럼 굴렀다. 남이 보면 십중팔구 미쳤다고 할 풍경. 이제 얼마 뒤면 또 내년을 기약해야 할 얼음 트레킹의 마지막은 늘 그렇다.
아래에 붙이는 것은, 바람이 매서운 계절에 더 매력적인 트레킹 코스들이다.
▦거제 지심도길
장승포 앞바다에 뱃길로 20여분 거리에 떠 있는 섬. 이 작은 섬의 겨울이 매혹적인 것은 오롯이 동백 때문이다. 선착장에서 마끝이라 불리는 해안절벽으로 이어지는 이어지는 길, 후박나무 군락지 지나 동쪽 해안을 따라 길게 누워 있는 길이 모두 빽빽한 동백나무 숲길이다. 겨울 한철 이 길은 새빨간 동백 터널이 된다. 동박새와 직박구리 울음 소리, 전망대에서 굽어보는 탁 트인 남해의 풍경도 잊지 못할 매력이다. ●장승포항에서 지심도로 가는 배가 하루 다섯 번 뜬다. (055)681-6007. 서울에서 장승포로 가는 버스는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오대산 적멸보궁 가는 길
절로 가는 길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 적멸보궁 가는 길은 다시 거기서 출발해 상원사 적멸보궁까지 이어지는 아름드리 숲길이다. 몇 해 전 아스팔트를 걷어낸 뒤 숨쉬는 길로 되살아났다. 발바닥 아래 부드러운 감촉으로 밟히는 것은 기름진 표토와 가을에 떨어진 낙엽과 순백의 흰 눈이 이룬 3층의 자연이다. 월정사 매표소에서 상원사까지 약 3시간, 상원사에서 적멸보궁까지 40~50분 걸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진부행 시외버스를 탄 뒤 진부에서 버스를 갈아타면 된다. 진부터미널에서 약 1시간 간격으로 월정사행 버스가 있다. (033)335-6307.
▦한탄강 트레킹 코스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주상절리 같은 현무암 지형을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인 철원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도 얼어붙은 강 위로 걸어가 가까이서 만져볼 수 있다. 한탄강 얼음 트레킹은 여름철 래프팅으로는 느낄 수 없는, 한탄강의 자연미를 감상할 수 있는 여행이다. 순담계곡에서 직탕폭포까지 얼음 트레킹이 인기가 높다. 고석정, 승리교 등을 얼음 위로 걸어서 구경할 수 있다. ●한탕강 코스 중엔 민간인 출입이 제한적인 곳이 있다. 11월부터 2월까지는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4차례 개방한다. 전적지관광사업소 (033)450-5558.
▦진안 마이산길
풍경에 비해 규모가 아담하다. 불끈 솟아오른 말귀 모양의 산을 한 바퀴 도는데, 천천히 둘러봐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겨울철 눈 덮인 마이산은 위험하지 않은 트레킹을 즐기려는 사람에게 인기다. 하늘을 향해 치솟는 신비로운 고드름도 볼 수 있다. 폭격을 맞아 움푹 패인 듯한 타포니 지형, 전통가마로 구워내는 옹기, 머루와인이 익어가는 노채마을 금굴 등도 함께 돌아볼 수 있다. ●전북 진안군에서 마이산으로 가는 버스가 자주 있다. 서울에서 진안으로 가는 버스는 센트럴파크시티터미널에서 출발한다. 마이산도립공원 (063)430-2228.
▦덕유산 칠연폭포 가는 길
남쪽 지방에 있지만 덕유산은 눈이 많기로 유명한 산이다. 구천동 계곡의 유명세에 가려 발길이 뜸한 칠연계곡은 그만큼 호젓하고 자연스러운 산길의 정취를 선사한다. 용추폭포에서 시작되는 트레킹 코스는 도술담, 문덕소, 명제소 등으로 이어진다. 길이 미끄럽고 급류 부분은 충분히 얼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칠연폭포에서 2시간 정도 더 오르면 향적봉 일대의 주목군락과 상고대를 볼 수 있다.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 덕유산IC에서 나와 용추폭포 방향 727번 지방도를 타면 된다. 덕유산국립공원 안성탐방지원센터 (063)323-0577.
봉화=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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