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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칼럼] 봄은 어디에 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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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칼럼] 봄은 어디에 와야 하는가

입력
2012.02.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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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사계(四季)는 제 각각의 소리와 색깔과 동작을 갖고 있다. 여름은 자라는 것들의 소리와 윤끼를, 가을은 익어가는 것들의 색채와 자세를, 겨울은 다시 기다리기 위해 근본으로 드는 것들의 멈추어버린 듯한 호흡과 낮은 엎드림의 몸짓을 갖고 있다. 봄은 새로 깨어나는 것들의 소리와 움직임과 색깔로 가득하다. 긴 잠에서 깬 개구리들의 하품소리, 곰들의 기지개, 터져 나오는 싹들의 여린 녹색이 봄의 무대를 장식한다. 여름이 성장의 드라마이고 가을이 성숙의 서사, 겨울이 기다림의 형식이라면 봄은 단연 소생과 부활의 장르다. 말라죽은 듯한 포도나무 줄기에 새싹이 돋고 앙상한 매실나무 가지가 꽃망울을 터트릴 때, 벌들이 햇살 속에서 날개짓을 연습할 때, 가장 둔감한 사람조차도 소생의 기적을 목격하고 부활의 있음을 확인한다.

그 소생과 부활의 기회는 평등하게 온다. 그것은 제비뽑기로 오지 않고 낯을 가리지 않으며 장소를 선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곳에 찾아오고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 이 평등성, 소생하고 부활할 기회의 평등한 분배야말로 자연의 순환질서 가운데서 봄이 보여주는 위대한 원리다. 우리는 이 평등의 원리가 가장 춥고 그늘진 곳, 가장 낮고 쓸쓸하고 어두운 곳에도 차별 없이 적용된다는 것에서 자연질서의 거대한 가르침을 본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는 "봄이 어디에 와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곳에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서 봄은 평등하게 오지 않는다. 소생의 기회는 평등하지 않고 부활의 가능성은 고르지 않다. 그 불평등 때문에, 살아나야 할 것들이 살아나지 못하고 부활해야 할 것들이 부활하지 못한다. 그 불평등은 대부분 인간이 제 손으로 만든 인공의 질서, 인위적 질서다. 그 질서는 인간의 세계를 초라하게 한다. 이 계절, 자연의 봄은 다시 무심히 찾아오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무심한 듯한 봄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유심히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인간세계의 초라한 질서를 자연의 위대한 질서에 가깝게, 한 발이라도 더 가깝게, 접근시킬 수 없을까?

그 접근의 있고 없음이 인간 집단들과 사회를, 국가와 문명을, 정의로운 것으로 밀어 올리기도 하고 야만의 것으로 추락하게 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부산스런 정치의 한 철을 맞고 있다. 이런저런 정책과 공약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정책, 그 모든 약속들이 밑바닥에 깔고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 정치의 가장 본질적인 목표는 평등의 실현이다. 평등은 사회정의의 핵심이다. 거기에는 기회, 자원, 소득의 평등이 포함되고 상벌과 인정의 공정한 분배가 포함된다. 한 사회가 공존공생의 가능성을 높이고 사회적 삶의 모든 층위에서 불만의 수준을 낮출 수 있는 것도 평등과 공정성의 실현 정도에 좌우된다. 이 때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다. "봄은 어디에 와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봄은 어디에 와야 하고, 어디에 '반드시' 와야 하는가? 모든 곳에 오는 자연의 봄과는 달리, 모든 곳에 오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이 '사회의 봄'이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자연의 위대한 원리처럼, 사회의 가장 낮고 그늘진 곳, 빼앗기고 궁핍한 곳, 내팽개쳐지고 억눌리고 무시된 곳에 소생과 부활의 봄을 가져다 주는 것이 정치의 원리여야 한다. 이 원리에 충실할 때 정치는 자연의 봄처럼, 예술과 종교처럼, 사람 살리는 소생의 한 장르가 된다.

문명은 흔히 자연에 맞서는 것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사실은 자연의 위대한 질서를 모방하고 그 질서에 가까이 가려는 것이 문명의 목적이고 목표다. 역사 과정에서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것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보는 순간 우리는 문명의 진정한 목적이 도덕적 진보의 성취에 있다는 주장을 수긍하게 된다. 평등의 실현을 향한 오랜 노력, 그것이 그 도덕적 진보의 핵심부에 있다. 온갖 자질구레한 계산을 다 해야 하는 이 정치의 계절에도 우리는 인간이 성취하고자 한 위대한 것의 본령이 무엇이었던가를 늘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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