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2005)에는 경복궁 근정전 위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줄타기 장면이 나온다. 경복궁의 3D 시뮬레이션 영상을 활용해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것이다. 경복궁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해 고민하던 제작사를 구해준 이 디지털 자료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제공한 문화원형 콘텐츠 중 하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운영하는 문화콘텐츠닷컴(www.culturecontent.com)은 한국의 역사와 전통, 민속, 예술 등 문화원형을 디지털화한 콘텐츠 30만여건을 모아 놓은 사이트다.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궁궐과 거리 풍경도 조선 후기 한양 도성의 생활사를 디지털로 복원한 ‘디지털 한양’을 활용했다. 도성 내 주요 건물과 장소 239개를 배치도와 이미지맵, 3차원 영상으로 제작한 콘텐츠다.
그동안 유료 서비스였던 문화콘텐츠닷컴이 이달부터 무료 개방됐다. 비상업적 용도에 한해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다. 총 30만여건의 콘텐츠를 정치, 경제, 종교, 인물, 의식주, 문학, 예술 등 14개 주제로 분류해 이미지, 동영상, 오디오, 텍스트 형태로 제공한다.
예컨대 조선 후기 중인 문화를 정리한 ‘디지털 여항 문화’에 들어가면, 당시 중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와 집, 자주 드나들던 곳, 그들의 옷차림과 생활용품, 직장 근무 광경 등을 이미지와 3D 영상으로 구경할 수 있다. 중인들의 시 백일장으로 유명했던 백전을 묘사한 플래시 애니메이션은 거기에 참여했던 실존 인물들이 등장해 백전 풍경을 전한다. 주요 인물의 삶과 에피소드, 사건은 물론이고 이를 소재로 한 창작 시나리오와 시놉시스도 수십 편 올라와 있다.
문화원형은 역사적 상상력의 보물창고다. 꺼내 쓸 수 있는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문화원형 디지털 콘텐츠화 사업을 시작한 것은 2002년. 매년 10개 안팎의 과제를 공모해서 개발한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문화콘텐츠닷컴은 2004년 문을 열었다. 대학과 연구소, 콘텐츠 개발업체 등이 만든 이 자료들은 2010년까지는 유료 판매여서 널리 쓰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사이트 이용에도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지난해 리모델링을 거쳐 이달 다시 문을 열면서 무료로 전환한 것이다.
그동안 문화원형 디지털 콘텐츠는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왕의 남자’ 말고도 영화, 드라마, 공연, 출판, 디자인, 캐릭터 등 여러 분야에 활용됐다. 영화 ‘신기전’에 등장하는 한국 전통무기나 ‘모던 보이’의 배경인 1930년대 경성의 풍물, 드라마 ‘황진이’의 기생 패션과 ‘별순검’의 소재가 된 조선시대 검안 기록, 수출 상품으로 성공한 토종 캐릭터 ‘뿌까’의 디자인에 쓰인 전통문양, 온라인 게임 ‘거상’의 한국 전통선박 등이 그것이다.
영화 ‘모던 보이’는 ‘1930년대 경성의 유흥문화’ 콘텐츠를 적극 활용했다. 이 콘텐츠는 모던보이 모던걸이 자주 드나들던 카페의 가구ㆍ커튼ㆍ조명 등 인테리어, 지금은 없어진 주요 건물의 외관과 내부를 3D 영상으로 제공하고 있어 영화 세트와 소품 제작, 촬영에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카페의 단골 손님과 여급 등 실존 인물의 에피소드나 거기서 종종 벌어진 자살소동 치정극 등 온갖 사건은 앞으로 더 많은 창작의 소재가 될 만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창작지원팀 김형민 팀장은 “최근 들어 역사적 소재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 증가하면서 문화원형 활용에 대한 문의도 꾸준히 늘고 있다”며 “문화콘텐츠닷컴의 새단장 오픈을 계기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이트에 들어와 잠자고 있던 문화원형 원천소스를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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