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요. 마지막 사죄라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13일 오전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앞에 무릎을 꿇은 백발의 일본인은 끝내 눈물을 떨궜다.
"일본의 한국 침략 역사가 부끄럽다"며 1970~80년대 청계천과 경기도 화성에 빈민자활공동체 탁아소를 세우고 사재를 털어 빈민가 철거민들의 이주를 도왔던 노무라 모토유키(81) 목사였다. 당시 함께 빈민 구제 활동을 했던 고 제정구 전 국회의원 13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10일 생애 60번째로 방한한 노무라 목사는 이날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대사관을 찾아온 길이었다.
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는 소녀상 앞에서 노무라 목사는 평생 지고 온 마음의 짐을 내리듯 자신의 몸집만한 배낭을 풀었다. 그가 꺼낸 것은 붉은 장미 한 송이와 성경과 악보, 그리고 플루트였다.
'봉선화' 악보를 펼치고 연주를 시작한 노무라 목사의 플루트에서 서투나마 진심 어린 선율이 흘러 나왔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는 한국어 가사 밑에 일본어 가사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연주를 끝낸 노무라 목사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잠시 흐느끼다가 "일제 시대 한국인의 애환을 담은 이 노래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며 "일본 침략이 없었다면 탄생하지도 않았을 노래"라고 말했다.
"나는 무비스타가 아니다. 이건 쇼가 아니다. 진심을 알아달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 노무라 목사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뜻을 담아 '진혼가'와 '우리의 소원'을 연달아 연주했다. 그의 악보집 속에서는 '아리랑', '선구자', '아침이슬', '비목' 등의 곡목이 눈에 띄었다.
"다섯 살 때부터 '조센징'들이 차별 받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일본인으로서, 예수님의 뜻을 전하는 목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죄의 의식을 마친 노무라 목사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항의한 탓에 나는 일본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을지도 모르지만 두렵지 않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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