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몸 아파도 약값 없어 끙끙 "사위가 돈 번다고 진료비 지원안돼"
"아픈 데 없으니 아무 걱정 마라, 날씨도 푹하다(따뜻하다). 괜찮다" 한쪽 눈이 안보이고 관절에 물이 차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김순이(76) 할머니는 혹한에 전기장판도 켜지 않은 냉골에 앉아서 딸에게 거짓말을 했다. 지난해 갑상선 암 수술을 받은 둘째 딸이 혼자 사는 어머니를 걱정해 안부전화를 하자 "괜찮다"는 말만 연신 했다.
한파가 매서웠던 지난 10일. 김 할머니가 살고 있는 서울 K구의 3평 남짓한 반지하 방은 한겨울 바깥 냉기를 고스란히 방안으로 옮겨 놓은 곳이었다. 김 할머니는 이불 위에 전기장판, 그 위에 이불을 또 깔아놓은 이부자리에서 베개로 등을 괴어주고서야 겨우 앉아 기자를 맞았다. "낮이라 전원을 껐다"는 전기장판은 차갑게 식었고 김씨는 연신 콧물을 훔쳤다.
김씨는 차상위 건강보험 진료비 지원(본인부담금 경감) 신청을 했다가 지난 해 8월 탈락한 사람이다. 차상위 진료비 지원은 기초생활수급자 의료급여보다 훨씬 적지만 그나마도 안됐다. 기자가 확인한 그의 생활은 그 누구보다 의료비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지만, 우리 제도는 그렇게 보지 않는 모양이다.
5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장사, 식당일 등을 하며 3남매를 키운 김씨는 성한 곳이 없다. 허리 디스크에다 척추 뼈까지 삭아 허리 통증이 극심하고 관절염이 있는 무릎과 발목에는 물이 차기도 했다. 어깨 통증으로 양 팔은 어깨 위로 잘 올리지 못하고, 고혈압에 이어 얼마 전에는 당뇨 판정도 받았다. 오른쪽 눈은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김씨는 병원은커녕 약조차도 제대로 사 먹지 못하고 있다. 소득 한 푼 없이 반지하 단칸방에서 홀로 살고 있는 그에게 병원비와 약값은 언감생심, 하루도 거를 수 없는 고혈압 약만 한 달에 한번 8,600원을 내고 타다 먹는 게 전부다. 김씨는 "허리와 다리 통증을 참다 참다 안 되면 근처 한의원에 가서 1,500원을 주고 침을 맞는다"고 했다.
김씨의 탈락 이유는 둘째 사위의 월급이 560만원으로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렸기 때문이다. 대학생 아들을 2명 둔 둘째 딸(54)네 집은 사위의 월급으로 네 식구가 생활하고, 시동생도 돌보고 있어 빠듯하다. 지난해 둘째 딸까지 갑상선 암 수술을 받으면서 더 여유가 없어졌다. 둘째 딸이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 반지하방을 구해주고, 김씨를 찾을 때마다 2만~3만원씩 쥐어줬지만 딸이 아파진 뒤 그마저도 없어졌다.
김씨와 같은 경우, 둘째 딸네 월 소득이 432만원(지난해 기준ㆍ최저생계비의 300% 미만)아래가 돼야만 차상위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만약 둘째 딸네가 자녀를 1명만 두고 있다면 월 소득이 352만원을 넘지 않아야 한다.
첫째 딸(57)은 홀로 1남1녀를 키우다 5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고, 막내 아들(52)은 10여년 전 사업 실패 후 행방불명 됐다.
김씨가 유일하게 기대는 것은 다달이 나오는 기초노령연금 9만원에다 차상위 장애 수당 3만원이 전부. 왼쪽 눈이 의안(義眼)인 김씨는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는 줄도 모르다가 복지사 도움으로 우연히 알게 돼 장애수당(시각장애 6급)을 받은 지 6개월밖에 안 된다. 이 돈으로 전기 전화 케이블TV 요금 등과 고혈압 약값을 댄다. 끼니는 복지관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주는 쌀 10㎏과 일주일에 한 번씩 가져다 주는 반찬으로 해결한다.
김씨는 "사위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데 아는 것도 없는 내가 더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정부 처분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씨의 관할 구청 관계자도 "기초수급자도 부양의무자 기준이 완화되고 있고 다른 차상위 지원은 부양의무자 기준 자체가 없는데 유독 차상위 의료비 지원만 너무 엄격하다. 김 할머니를 도와줄 방법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170만명의 법정 차상위 계층 중에 의료비 지원 대상자는 30만명에 불과하다. 이중 성인은 12만명 뿐이다. 차상위 의료비 지원은 소득(재산 환산 포함)이 최저생계비의 120% 미만이고, 부양의무자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 외에도 18세 미만이거나, 희귀ㆍ난치성 질환 또는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만성질환자인 성인만 대상이다. 차상위 건강보험 진료비 지원은 원래 국고에서 부담했으나 2008년부터 건강보험 재정에서 충당하면서 건보재정 문제로 지원확대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워낙 혜택이 제한적이다 보니 제도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차상위 자활사업 지원을 받고 있는 부산 해운대구 김순미(48ㆍ가명)씨는 말초신경염과 장기질환으로 몸이 아프지만 "그런 제도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의료비 지원에서 제외된 차상위 계층들은 주민센터 등의 권유에 따라 장애진단을 받고 경증장애수당을 받는 경우가 있지만, 월 3만원으로 너무 적어 실질적인 혜택이 되지 못한다. 장애인실태조사(2008년)에 따르면 장애인들은 국가ㆍ사회에 대한 요구사항에서 의료보장을 1순위로 꼽았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차상위 의료지원 범위가 너무 제한적"이라며 "우리 사회의 노인ㆍ장애인 지원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낮다"고 비판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 장애·한부모 아니면 지원책 사실상 전무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7월 소득재조사 과정에서 기초생활수급자에서 탈락한 2만7,000가구를 우선돌봄 차상위 가구로 선정해 집중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들 가구 중 한부모 지원ㆍ장애수당ㆍ건강보험 진료비 지원ㆍ차상위 자활사업 지원 등 4대 차상위 제도로 편입된 수는 7,500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중증 환자가 없고 부부가 모두 있으며 장애인이 아닌 일반적인 차상위 계층은 사실상 지원 제도 자체가 거의 전무하다.
복지부는 4대 차상위 지원제도 대상이 되지 않지만 지원 필요성이 있는 우선돌봄 차상위 1만6,000가구를 골라 어떤 지원을 할 수 있을 지 연구에 들어갔다. 현행법상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정부양곡을 절반으로 할인해 제공하는 정도다.
다른 정부 부처에도 15개 안팎의 차상위 계층 지원제도들이 있지만 이마저도 대부분 4대 차상위 지원을 받는 가구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지식경제부가 전기요금 할인, 가스요금 할인 등을 기초수급자에서 차상위까지 확대했지만, 의료비 지원 대상자ㆍ장애ㆍ한부모ㆍ자활근로 참여자가 아니면 지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교육과학기술부가 거의 유일하게 고교생 수업비ㆍ입학금 지원을 건강보험료 납부 자료를 근거로 차상위 계층까지 지원하고 있다. 이 사업은 시도교육청으로 이관돼 자격기준이 최저생계비의 120~140% 미만으로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차상위 가구가 혜택을 받고 있는 정부 양곡지원은 지침에 4대 차상위 가구로만 국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일반 차상위 지원은 실질적 도움이 될 만한 제도 자체가 없다 보니, 신청도 없고 해서 사실 정확한 차상위 규모도 알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월 소득이 최저생계비(4인가구 기준 149만원)의 100~120%인 법정 차상위 계층이 170만명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한편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법정 차상위는 최저생계비의 120%지만, 제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한부모 가정은 130%가 기준이다. 근로장려금 지원, 중증장애인연금 제도 등 유사 차상위 지원제도들은 부부합산 소득을 기준으로 해서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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