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마을살리기에 힘쓰겠다고 하면서 성미산마을이 화제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주변인 성산동 서교동 연남동 합정동에 90년대 초반부터 공동육아를 하던 이들이 모여 생활협동조합을 만들고 마을산을 지키는 싸움을 함께 하더니 도서관 자전거길 대안학교 동네방송 동네극장까지 만들어서 외적으로는 동네를 개발로부터 지키면서 내적으로는 일상이 축제가 되게 했다. 이 운동에는 숱한 사람들이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내며 함께 했고 주축인 몇은 마을살리기 전문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어떤 운동이든 가장 어려운 것은 성장배경이 달랐던 이들이 처음 모였을 때 생기는 다양한 갈등을 수습하는 일이고 목표에 함몰되어 이상에서 이탈해버리는 걸 막는 일이다. 성미산마을이 현재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비결은 '누군가 제안하면 고운 눈으로 바라보고 몇 걸음 함께 가주자'는 따뜻한 '강령'이 지침이 되었던 덕분이다. 그 강령을 만든 김상복(56•KBC파트너스 대표코치)씨를 만났다.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쟁의부장을 지낸 노동운동가였던 그는 마을만들기 너머를 이야기했다.
_코치가 뭐하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A에서 B로 가려고 할 때 B에 도달한 사람으로서 도와주는 사람이 멘토라면 그를 격려하면서 B로 함께 가주는 사람을 코치라고 해요. 어떤 일을 이룰 때 심리적인 어려움을 도와주는 심리가드기도 하고요."
_원래는 노동운동가였다고요.
"제가 원래 효창동에서 살았어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이사 갔는데 그 무렵에 원효대사 동상이 만들어지고 김구선생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무덤이 있었어요. 백범 선생님 묘지는 잔디밭이 좋았어요. 거기서 딱지치기하다가 소사 선생님한테 혼나기도 하고.(웃음) 초등학교 들어가니까 위인전을 읽히잖아요. 거기 나오는 사람이 다 동네에 다 있는 거예요. 백범 선생 위인전을 읽는데 백범 선생이 우리나라 왔다가 내리지도 못하고 상해정부로 가는 걸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역사인물이 내면의 영웅이 되면서 사회의식이 싹텄어요. 그때부터 독서에 빠지고 갑갑한 사춘기를 보낼 때 중학교 선생님이 고등학교에 가면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하라고 권했어요. 선린상고에 진학해서 흥사단아카데미에 들어갔는데 그때 대학에 있는 선배들이 농촌봉사활동을 가면 고등학생들도 와서 배우라고 한명씩 데려갔어요. 밤새 토론하는 거 듣고.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향린교회 대학생부에서 활동을 같이 했는데 76년쯤에 방림방적 누나가 편지를 보냈어요. 그 편지를 읽고는 가슴이 아파서 혼자서 영등포 공단으로 찾아갔어요. 거기서 해태제과에 다니는 누나가 이야기를 하는데 하루에 사탕을 3,000개를 비닐로 싼대요. 그 누나의 손가락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니까 요리로 싸는 건 요리로, 조리로 싸는 건 조리로 비틀어졌어요. 제가 그때 '삼천리 방방곡곡 바위틈틈이 민주노조를 세우겠다' 약속을 했어요. 당시 민주적인 노조가 한 10개나 있었을 때인가. 그래서 도시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노동현장에 가서 문화활동하는 작업도 하고. 88년에 '월간노동자세상' 편집장을 했고 90년에 전노협 창립하는 것에 참여했습니다."
_장애가 있으면 현장운동 하기는 힘들지 않나요? 차별도 있을테고.
"전혀. 95년쯤 제가 금속노련에 있을 때 장애인대학생들이 건국대에서 캠프를 한다고 저를 불렀어요. 노동운동하는 사람으로 말하면 된다고 해서 갔더니 소아마비 뇌성마비 시각장애 대학생이 모여서 연합엠티를 하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어, 지체, 너희 조용히 해' 그러면서.(웃음) 국회의원부터 요소요소에 있는 장애인을 불러서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거기서 야단도 엄청 맞고 배우기도 많이 했어요. 당신이 장애인을 위해서 한 게 있느냐. 명예정상인처럼 저쪽으로 투항해서 안락하게 지내는 것 아니냐. 그 정도로 운동권에 있으면 장애를 자각할 필요가 없었어요. 오히려 장애인이기 때문에 경찰의 눈을 따돌릴 수 있어서 좋은 점이 많았다고나 할까. 78년엔가 전주 남문교회를 점거한 적이 있는데 유인물을 어떻게 밖으로 빼돌릴까가 고민이었는데 저는 그냥 교회 왔다가 잘못 섞인 사람으로 보이니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심리학자 아들러가 기관열등감이라는 걸 말했잖아요. 인간은 누구나 열등감이 있? 어떤 기관이든 부족한 게 있으면 그게 우월성을 추구하는 동력이 된다. 제 소아마비가 다른 우월성을 추구하는 동력이 됐어요. 저는 고등학교만 나왔지만 계속 정책통이었어요. 경찰이 잡으러 오면 업혀서 도망가는 일이야 많았지요. 집회를 할 때 저는 군중 속에 있으면 밟히니까 바깥에서 전체를 보는 역할을 하거든요. 형사들이 나를 구경하는 사람으로 보지 컨트롤타워로 안보는 이점도 있어요. 강의를 해도 다른 사람은 대강의를 하는데 저는 몸이 이러니까 사랑방강의를 많이 해요. 사랑방에서 대화하고 독서하면서 성찰적인 운동을 하니까 영향력은 더 커지는 거지요."
_마을 만들기는 어떻게 하게 됐나요?
"2000년대 초반까지도 노동운동을 했는데 노동운동 현장인 영등포구가 다리 하나 건너면 바로에요. 아내도 같이 활동했기 때문에 아들은 구청 어린이집에 맡겼는데 92년쯤에 출판인 고경대씨가 공동육아어린이집을 만든다고 함께 하자고 그래서 집에 모아둔 500만원을 다 털어서 동참했어요. 공동육아를 하다보니까 애들이 초등학교에 가면서 공부방을 만들고 취미교실을 만들고 엄마 아빠들이 취미활동을 하는 여러 가지 모임을 만들고…제가 있던 노동조직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가해자인 남자에게는 당연히 책임을 물어서 당장 물러나게 하고 수습을 어떻게 할까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가 '조심좀 하지,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냐'고 발언한 것이 피해자분한테 상처를 주어서, 그걸 2차 가해라고 하는데, 저도 노동운동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간이 많이 나니까 마을 일에 더 많이 참여를 하게 됐고 결국에는 대안학교 만드는 일은 제가 주로 나섰지요."
_소수자이면서도 가해자가 될 수 있군요.
"당시 노동운동이 위기에 처했을 때인데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에도 분노와 좌절을 느꼈고 내 안에 청산되지 않은 가부장적인 의식과, 양비론적으로 다 비판해야 한다는 잘못된 의식과, 젊은 세대와 의사소통이 안되는 것이 복합적으로 섞이면서 과잉반응을 한 거지요. 깊이 반성했습니다."
_운동권을 떠나서는 장애인이라는 게 사실 피해자이기 십상이지요?
"그렇지요. 두 살 때 소아마비가 걸렸는데 네 살 때 소아마비를 고친다고 6개월 동안 온몸에 침과 뜸을 놨어요. 그게 얼마나 끔찍한 폭력이에요? 다리가 낫게 되는 약속이 된 날 저를 층계에 세워놓고 목발 없이 올라가라는 거예요. 못 올라간다고 회초리를 치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비가 오는데 엄마가 늦게 오는 거야. 다들 복도에서 기다리는데 애들이 놀릴까봐 먼저 갔어요. 애들이 따라오면서 놀렸어요. 그때 선생님이 오더니 애들 야단치고 저를 꼭 껴안으면서 (잠시) '너는 쟤네들을 미워하면 안된다. 선생님하고 약속할 수 있지?' 제가 이걸 오래 잊고 살다가 86년 다산 보임 사건(정부가 조작한 반정부단체 사건) 주모자로 끌려가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40일 동안 고문을 당했어요. 너무 힘드니까 주마등처럼 과거가 생각나요. 그때 그 선생님 말이 생각났어요. 그때 용서를 해야 내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가 되니까, 그래야 이겨내는 거니까. 제가 그래서 저를 고문한 이들을 용서를 했어요. 제 아내 말로는 제가 오히려 용서 못한 것은 엄마라고 해요. 어머니는 당신 때문에 자식이 소아마비라고 자책하며 사니까 제가 장남으로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살아야 하잖아요. 학교 갈 때도 넘어지면 엄마 마음이 아플까봐 엄마가 쳐다보는 골목을 돌아갈 때까지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걸어요. 제가 코칭을 하니까 여성들이 저한테 받는 것을 선호하는데 저는 여성을 코칭하는 게 참 불편하거든요. 그래서 선배여성코치들과 상담을 하면서 깨닫게 됐지요. 늘 우시는 어머니 모습이 아들에게는 공포가 됐달지, 내가 어린이인데도 엄마를 보살펴야 되는 공포, 엄마를 울지 않게 해야 한다는 어려움."
_한국사회에는 어린이로부터 보호를 갈구하는 미숙한 어른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에요.
"1930년부터 55년까지 전세계가 전쟁을 겪었어요. 전쟁이란 총력동원체제잖아요.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동원체계에 순응하고 집중해서 살아야 하고 그 여진에 의해서 다시 박정희식 동원체제와 산업화 동력의 일원이 된 거 아닙니까. 30년 세대인 아버지와 50년대 세대인 아들로 내려오면서 계속 상처만을 안고 사는 게 사회적으로 누적될 뿐 치유하고 어른이 되는 과정이 없어요. 약한 어머니 밑에서 고통을 감춰야 하는 '장남'으로 훈육된 채 내면의 혁명이나 여유를 겪을 새도 없이 곧바로 운동으로 투입됐으니 문제가 해결될 시간이 없었어요. 제가 요즘 구술사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제 사회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를 이야기하면서 변명할 사람은 변명도 하고 들어주기도 하면서 가해 피해의 문제도 서로 털어놓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사회적으로 대대적인 치유운동이 일어ぞ?합니다. 가해자도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스스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거든요. 저부터 그 분에게 용서받는 과정을 겪고 싶고요. 요즘 활발한 소셜네트워크 환경이, 사람들의 아픔을 털어놓는 통로로 활용돼도 좋겠지요."
_민주주의의 기본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가해자 치유를 이야기하면 반동을 용인해주는 게 되지 않을까요?
"압도적 승리의 시점이 오니까요."
_어떻게 확신하지요?
"76년에 방방곡곡 바위틈틈이 민주노조를 세우겠다 그랬을 때도 불가능해 보였지만 달라졌잖아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옛날과는 확실히 달라요. 자기 삶에 대한 주체적 결정권이 굉장히 확대돼 있어요. 삼식이나 이사갈 때 마누라가 버릴까봐 어떻게 한다 같은 농담을 보면 남성의 위기라고 할 정도로 여성의 결정권도 보장받고 있어요. 반동이 발붙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을만들기가 중요하고요."
_왜요?
"과거의 운동이 정치 경제의 민주화를 이루고 의회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위한 운동이었다면 현재의 운동, 미래의 운동은 민주주의의 주체로 살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그런 점에서 촛불 같은 것도 의미가 있지요. 90년대에 공동육아 생활협동조합운동을 하면서 이게 분명 민주주의를 살아내는 것으로 의미있다고 봤지만 민주화 운동에 집중할 때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뭔가 속물스럽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우리들의 구체적인 행복에 의미부여를 해주자 그러면서 '누군가 무슨 제안을 하면 고운 눈으로 바라봐 주자, 먼저 가고자 하는 사람이 한발 내디디면 대여섯 발자국은 함께 가주자' 같은 주장을 하게 된 거지요. 이런 마을을 모래짬짬이 만들고 싶어요."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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