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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우체국' 억압의 세상… 미워할 수만은 없는 불량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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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우체국' 억압의 세상… 미워할 수만은 없는 불량 우체부

입력
2012.02.1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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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찰스 부코스키 지음·박현주 옮김/열린책들 발행·253쪽·9,800원

미국문학사상 최고의 문제 작가로 꼽히는 찰스 부코스키(1920~1994)가 51세 때인 1971년 발표한 첫 장편소설로, 우체국 직원으로 일했던 자신의 30, 40대 시절을 모티프로 한 자전적 작품이다. 대학 중퇴 이후 떠돌이 노동자로 온갖 단순노동'(그 중엔 도살장, 개사료 공장도 있다)에 종사하면서, 20대 초반에 잠깐 단편소설을, 35세부터는 시를 발표했던 부코스키는 이 독창적 소설로 단번에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다.

주인공은 부코스키가 쓴 장편 6편 중 자전적 내용이 담긴 5편에 등장하는, 그러니까 작가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헨리 치나스키. 짧고 단순한 문장, 적나라한 성적 표현, 에피소드 중심의 구성과 더불어 '부코스키 스타일'의 핵심 요소인 이 캐릭터는 술ㆍ경마ㆍ섹스에 빠져 살고, 직장 상사이든 초면이든 상관없이 거친 욕설 혹은 농담으로 응대하는 마초다. 소설은 이 불량 인간이 임시직 집배원으로 취직했다가 17년 만에 안정된 우체국 정규직 자리를 내던질 때까지 일으킨 기행과 좌충우돌의 일화들을 짤막짤막하게 이어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우편물을 배달하러 갔다가 그 집 여자와 질펀한 정사를 벌인다. 상사가 근무 태만을 꾸짖으며 발부한 경고장을 면전에서 휴지통에 던진다. 본능에 몸을 내맡기는 그의 언행은 독자에게 당혹감과 묘한 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치나스키는,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여자아이에게 사탕을 줬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린 늙은 집배원을 위로하는 유일한 동료이고, 미친 듯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젊은 집배원에게 적당히 대꾸해주는 아량을 지닌 선배다. 자기를 버리고 떠난 옛 애인의 장례식을 그녀의 아들과 함께 치르기도 한다. 물론,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경마장으로 달려가 돈을 따고서는 "장례식에는 뭔가 있다. 사물을 좀 더 똑똑히 보게 한다. 하루에 한 번씩 장례식이 있다면 부자가 될 텐데"라며 다시금 엇나가지만.

거칠 것 없다는 듯 살아도 치나스키는 결국 패배자다. 동거 생활은 늘 그가 여자에게 버림 받는 것으로 끝난다. 무수한 실연 끝에 나이 든 동거녀 마리나를 만나 딸을 얻지만, 자유분방한 마리나가 젖먹이를 데리고 떠나면서 짧은 행복도 끝난다. 어지럼증을 참고 일하며 성심껏 부양했건만. "일주일에 서너 번 마리나를 보러 갔다. 아이를 만날 수 있는 한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치나스키는 애써 담담하게 독백한다.

그를 가장 무력하게 하는 건 우체국으로 상징되는 노동 착취와 관료제다. 하루 두 번 허용된 휴식시간 10분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산더미 같은 우편물을 정해진 시간에 분류하지 못하면, 우편 배달구역의 긴 목록을 줄줄 외지 못하면 곧바로 경고장이 날아든다. 우는 소리는 절대 안 하는 치나스키는 한 동료에 대한 묘사로 숨막히는 현실을 고발한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 사람은 사라졌다. (중략) 너무 피곤해 이발도 못 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우체국> <팩토텀> (1975)과 더불어 부코스키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주는 장편 3부작으로 꼽히는 <여자들> (1978)도 함께 출간됐다. 거대한 억압 속에서 빈털터리로 나이 들어 가는, 그러면서도 성깔머리는 여전한 한 장년 남자의 일상이 어쩐지 처연하게 느껴지는 <우체국> 에 비해, <여자들> 은 우체국을 나와 유명 전업 작가가 된 중년의 치나스키가 30명도 넘는 여성과 차례로 관계를 갖는, 그야말로 리비도로 충만한 소설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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