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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재벌가에 엄부(嚴父)가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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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재벌가에 엄부(嚴父)가 없다면

입력
2012.02.0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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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들 뭐야! 이 술 냄새. 대낮인데 아직도 자고 있어?"

이른 아침, 방문이 열리며 호통과 함께 솥뚜껑만한 손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함께 자고 있던 친구도 엉겹결에 얻어 맞고는 얼굴을 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아들들은 물론 손자들에게도 가혹할 정도로 엄했다. 그는 말년에 자질이 보이는 몇몇 대학생 손자들에게 가회동 자택에 들어와 살면서 자신을 보고 배우게 했는데, 게으름을 피우거나 사치를 부리는 행위는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재벌 개혁 목소리가 드높은 요즘 과연 이렇게 자란 재벌 2, 3세들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대기업의 중소업종ㆍ골목상권 침해 논란과 함께 재벌가 딸들의 '빵집 스캔들'때문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 고생 한번 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별종'이라는 재벌 2,3세들의 부정적 이미지가 더 강화하는 듯 하다.

재벌 개혁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처럼 보인다. 하지만 참 지난한 과제다. 이명박 정부를 제외하고 역대 정권마다 재벌 개혁을 화두로 내세웠지만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 이 번에도 여야가 펼쳐 보인 메뉴판을 보니 모두 한 두 번쯤 나왔던 내용들이다.

재벌 개혁을 하려면 먼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재벌은 지난 50년간 한국경제 발전을 이끌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5대 그룹이 전체 상장기업 매출의 40%, 30대 대기업이 95%를 차지하는 나라, 100만(약 11억원) 달러 이상을 자력으로 수출하는 중소기업이 1,000개도 안 되는 나라. 단 몇 달만 수출 적자가 나도, 글로벌 위기가 와도 재벌에 의존해야 하는 나라. 때문에 재벌 개혁은 경제성장 구조를 외끌이에서 쌍끌이(재벌+중소기업)로 만드는 일과 맞물려 있다. 단순히 법과 제도를 손질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국가 발전전략을 다시 짜는 큰 과업이다. 어설프게 덤볐다간 곧장'재벌을 옥죄면 경제가 어려워져 결국 서민들만 피해를 본다'는 반대 논리에 부딪치게 된다.

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사업 영역 구분은 훨씬 정교하고 치밀해야 한다. 무턱대고 중소기업을 보호하겠다는 발상은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보호하지 못한다. 가령 대기업의 식당 등 영세서비스 업종 진출을 규제하면 당장"왜 빕스(CJ)는 안 되고 아웃백(외국업체)은 되느냐"는 반론에 직면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벌의 '오너 리스크'를 막는 일이다. 배임 횡령 등 오너들의 불법과 일탈은 엄히 다뤄야 한다. 동시에 능력이 있든 없든 일감 몰아주기와 사업 다각화 등 갖은 방법으로 대대손손 기업을 물려주는 것도 제도적ㆍ비제도적 방법으로 억제해야 한다. 특히 오너들의 인식 변화를 강제할 수 있는 사회 풍토 조성이 중요하다.

기업은 오너가(家)가 일으켰다. 하지만 기업은 국민과 사회 인프라와 인적 자원, 전통과문화의 토대 위에서 성장했다. 때문에 기업에는 공적 성격이 강하게 담겨 있다. 삼성과 현대가 오너의 노력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수 십만 임직원들의 땀과 눈물, 인생을 쏟아부은 결과다. 오너들이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피가 섞였든 그렇지 않든 유능한 경영자를 골라야 하는 이유이다.

어쩌면 재벌 2, 3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도덕과 책임 의식이 투철한 엄한 아버지(嚴父)라는 생각이 든다. 기업활동의 자유, 시장경제를 말하기 앞서 기업과 기업인의 책임과 절제, 차별없이 능력에 따른 성취와 성취를 위한 노력에 주목하는 엄부. 재벌가에 더 이상 고 정주영 명예회장처럼 자신과 자식에게 엄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 역할은 결국 우리 사회가 떠맡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 재벌개혁의 핵심일지 모르겠다.

박진용 산업부 차장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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