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전 비서 고명진(40)씨가 돌연 양심선언을 한 배경이 뭘까. 그가 언론에 공개한 '고백의 글'을 보면 부하에게 허위진술을 강요해 위기를 모면하려는 '윗선'에 대한 실망감이 핵심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새누리당 고승덕 의원의 폭로로 시작된 이번 사건 초기, 고씨는 고 의원이 말한 돈 봉투를 전달한 '뿔테 남자'이자 돈 봉투를 다시 돌려받은 당사자로 지목됐다. 고씨는 그러나 3차례 검찰 조사에서 일관되게 "돈 봉투를 돌린 적은 없고, 고 의원한테 돈 봉투를 돌려받은 후 돈은 내가 썼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그런 그가 수사 착수 한 달만인 지난주 검찰의 비공개 소환에 응한 뒤,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은 채 출석해 "고 의원으로부터 돈 봉투를 돌려받은 뒤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보고했고, 조정만 국회의장 정책수석비서관에게 돈 봉투를 돌려줬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지금껏 개입 의혹을 부인하고 있는 김 수석과 조 비서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에 대해 고씨가 고립무원의 상황을 맞았는데도 윗선 가운데 누구도 책임지겠다고 나서지 않고 부인 또는 침묵으로 일관하자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또 거짓 해명의 덫에 걸린 채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주변 인사로까지 검찰의 압박이 가해지자 심리적으로 무너졌을 수도 있다.
고씨는 언론에 공개한 글을 통해 자신을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열쇠'로 지칭하면서 "정작 책임 있는 분이 자신의 권력과 아랫사람의 희생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을 보고 결단을 내렸다"고 윗선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고씨는 그러면서 "사건과 무관한 사람까지 허위진술을 강요 받고, 더 이상 무고한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더구나 수사를 방해하려는 박 전 의장 측의 은폐 시도가 있었다고 고씨가 고백하면서, 이 부분에 대한 검찰의 수사도 불가피해 보인다. 당초 검찰 수사 착수 직후 해외 순방 중이던 박 전 의장은 고씨와 여러 차례 통화한 사실이 드러나, 말 맞추기 의혹이 제기됐다. 또 박 전 의장 측 인사들이 통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차명폰을 사용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지난달 고씨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유의미한 증거를 전혀 확보하지 못한 것도 윗선의 증거 은폐 시도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고씨가 압수수색에 대비하고 있던 정황이 여럿 포착됐는데, 윗선으로 예상되는 누군가에 의해 수사 정보가 사전에 누설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검찰은 "아직 뚜렷한 증거가 없다"고 하지만, 조직적 은폐 시도의 당사자인 고씨마저 이를 시인한 이상 관련 수사를 미룰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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