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에 이 시스템이 구축됐더라면 ‘로렌조 오일’같은 영화는 세상에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정해일(58) 서울대 희귀질환 진단치료기술 연구사업단장은 “의사와 환자도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적(敵)은 물론 병(病)이다. 학계에 보고되지 않는 새로운 병들이 일주일에 한 두 건씩 보고되고 있고, 현대 의술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백전백승의 표현은 우겨 넣은 측면이 없진 않지만, 최소한 병의 실체를 알면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다 명백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 4년간 심혈을 기울인 결과물을 쏟아냈다. 국내 최초로 희귀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연구 네트워크인 ‘희귀질환 지식베이스’(http://www.snubi.org/rcrd/rare_disease/)’를 9일부터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식베이스는 국내ㆍ외 희귀질환에 대한 종합 네트워크다. 국내 희귀질환 연구자 및 연구 분야 정보, 희귀질환 정보, 레지스트리(환자정보)는 물론이고 국내에서 시행 가능한 유전자검사 및 검사기관 등의 정보까지 검색할 수 있다. 진단명이 명쾌하게 떨어지지 않는 희귀병에 걸린 환자나 보호자가 이를 이용하면 명의를 찾아 헤매느라 속앓이를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로렌조 오일’은 다섯 살 아들(로렌조)이 이름도 알 수 없는 희귀병으로 곧 죽게 된다는 비보를 접한 어머니가 의학서를 뒤져가며 쌓은 지식과 논리를 바탕으로 모든 걸 포기한 채 아들의 병마와 싸우는 과정을 그렸다.
정 단장은 “이 시스템을 통해 희귀병을 연구하는 의사들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희귀질환 지식베이스엔 각종 근육병과 미토콘드리아 질환 등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 보고된 725종의 희귀병이 총망라됐다. 그는 “대형 병원과 질병관리본부 등에 산재해 있던 질병 정보와 환자의 유전정보를 한 데 모은 것”이라며 “프랑스국립보건의학연구소(INSERIM)와도 정보 공유 협약을 마친 만큼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희귀질환 지식베이스”라고 강조했다. 국내 의료진이 유럽의 희귀질환 정보가 총망라된 데이터베이스 오파넷(Orphanet)의 자료도 실시간 공유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희귀질환 연구에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는 전망도 나온다.
따지고보면 이번 성과는 ‘혈세의 산물’이기도 했다. 희귀질환은 환자가 적어 제약회사가 달려들지 않고 있으며, 의사와 병원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있는게 사실이다. 정 단장은 “정부가 4년간 100여억원의 예산을 지원한 덕택에 가능했다”며 “희귀질병 환자도 일종의 의료 소외계층인 만큼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아과 전문의인 정 단장이 희귀 질환 전문가가 된 이유가 궁금했다.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해로운 걸 알면서도 몸을 혹사시켜 병을 얻는 게 아니잖아요. 아무런 죄도, 이유도 없이 고통받는 환자들을 돕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또 있을까요.”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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