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
바람은 달려가고
연인들은 헤어지고
빌딩은 자라난다
송아지는 태어나고
늙은 개는 숨을 거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찻잔에 물이 잔잔하고
네 앞에 시 한 편이 완성되어 있을 때
● 우리가 꿈꾸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입니다. 바람이 불고, 사랑이 끝나고, 탄생과 죽음이 이어지고.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 말고는 어떤 일도 안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너무 많은 사건, 사고로 너무 많이 피로해요. 사료값 때문에 송아지들을 전부 굶겨 죽여야 하고 비싼 약값에 어린 환자가 치료도 못 받아 앓고 있는 일. 그런 일들을 다반사로 만들 무역협정을 맺는 일. 언론인에게 제대로 보도할 권리를 빼앗아 버리는 일. 이런 부자연스러운 일들 없이도 시는 완성될 수 있어요. 사라진 바람에 대해서만, 사랑의 슬픔에 대해서만, 언어와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들로만 잔잔하게 시 쓸 수 있는 날들을 꿈꾸어 봅니다. 찻잔 속의 물처럼 고요한 삶, 그토록 간결한 시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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