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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 (1) 슬로베니아 철학자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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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 (1) 슬로베니아 철학자 지젝

입력
2012.02.0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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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젝 "신세계 질서가 붕괴되고 있어… 어떤 제도로도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신세계질서의 붕괴를 경험하고 있다. 슬럼과 배제된 자로 가득 찬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신세계다. 현존하는 어떤 제도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한국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최근 세계 정세를 이렇게 진단했다. 지난해 10월 월가의 '점령하라' 시위의 진원지인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에서 연설했던 그는 "과거 40~50년 동안 한국의 성장에서 드러나듯,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은 체제이지만 근본적으로 모순과 적대를 가진 체제"라며 "점령하라 시위는 자본주의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로 인한 대중의 정치참여 확대와 관련해서는 "SNS를 가능하게 한 클라우드 시스템(소비자가 입력한 전자기기 정보를 한 곳에 저장할 수 있는 연동 서비스)으로 인해 기존 국가 주도의 '빅브라더'가 아니고 다양한 '빅브라더들'이 세상을 통제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등 저서로 알려진 그는 영화, SF소설 등 대중문화를 통해 독특한 철학적 사유를 펼치며 세계적 지성으로 꼽혀왔다. 2003년 한국철학회 초청으로 방한해 강연했고, 2007년 청소년잡지 에 무료 기고문을 보내는 등 한국과 인연도 깊다.

그는 "경제와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고 활력 넘치는 지적 환경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을 존경한다"며 "나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관심을 알고 있고, 한국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자 한다"고 말했다.

한국일보와 출판사 자음과모음이 공동기획 한 '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는 세계적 석학들에게 최근 전 세계적인 정치, 사회, 경제 위기에 관해 묻고 그들의 혜안을 듣는 인터뷰 시리즈다. 지젝을 비롯해 자크 랑시에르(프랑스ㆍ철학), 가라타니 고진(일본ㆍ문학), 지그문트 바우만(독일ㆍ사회학), 악셀 호네트(독일ㆍ철학), 크리스토프 멘케(독일ㆍ철학) 등 해외 지성들의 인터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한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 "슬럼과 배제된 자로 가득한 세상… 사회적 연대 나서야"

슬라보예 지젝은 이 시대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로 꼽힌다.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정치와 대중문화 현상을 독창적으로 해석해 왔을 뿐 아니라, 현실정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이를 학문적 영감의 발판으로 삼으면서 철학적 지평을 넓혀왔다. 1990년 옛 유고연방이 해체된 후 슬로베니아의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활발한 대외 활동 덕에 지젝은 그의 사상을 깊이 접하지 못한 대중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낯설지 않은 학자로 회자된다. 가깝게는 지난해 10월 '점령하라' 시위의 진원지인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에서 한 연설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퍼져나간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지젝은 지난달 30일 한국일보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전 세계적으로 복잡다단한 사회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대해 "우리는 신세계질서의 붕괴를 경험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는 "당장 손쉬운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보다 사유를 해야 한다"면서 "20세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너무 많이 세계를 변화시켜왔는데, 이제 변화보다는 해석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대 연구실에서 전화 인터뷰에 응한 그는 "요즘 많이 아프다"면서도 각 분야에 걸친 질문들에 장시간 친절히 답을 했다. 인터뷰는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가 진행했다.

-지난해 주코티 공원에서 한 연설은 외신에 보도될 만큼 화제였는데, 어떻게 하게 됐나?

"근처 뉴욕대에 특강을 갔다가 우연히 시위에 참가하게 되었다. 나의 메시지는 '자기 스스로 만족하지 말라'였다. 시위가 끝난 뒤 현실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위를 계기로 우리 현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삶의 토대를 고민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어떤 자유를, 어떤 정부를, 어떤 행복을 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사람들 반응은 어땠는가?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응은 썩 나쁘지 않았다.(웃음)"

-점령하라 시위를 비롯해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세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 위기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위기가 극복될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이 위기가 파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 금융경제, 재산권, 생명공학윤리 등 다양한 영역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단기처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를 좀더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세계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 금융시스템, 지적재산권 갈등, 사유재산 문제 등은 이미 알려진 책이나 이론으로 풀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신세계질서의 붕괴를 경험하고 있다. 슬럼과 배제된 자로 가득 찬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신세계다. 이 와중에도 한국이나 싱가포르 같은 나라는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인) 문제는 더 악화하고 있다. 나는 지금 존재하는 어떤 제도를 통해서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점령하라' 시위가 남긴 교훈도 이런 것이라고 본다. 이 시위는 위기의 체제, 또는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줬다. 이 위기가 위험하게 보이는 것은 단일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좌파이긴 하지만, 20세기에 제기됐던 사회주의 해결책이 성공적이었다고 믿지 않는다. 지금 새로운 공산당 운동을 조직할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이런 실패한 기획들을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위험의 실체다. 위기가 왔는데, 아무도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제시하지 못한다. 뉴욕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 모인 사람들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냥 앉아서 자본주의의 파국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한다. 사회적인 연대나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다만 이런 운동이 손쉬운 해결책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유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냉전시대와 같은) 집단적인 신념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파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실재의 세계'에 직면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지젝은 9.11테러 직후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딴 저서를 냈다. 실재란 매트릭스 속 레오가 모피어스가 제시하는 '빨간 약'을 먹고 알게 된 '진짜 현실'을 말한다.)

빠른 해결책을 기대할 수 없지만, 분명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 출현하고 있다. 점령하라 시위도 마찬가지다. 이 시위는 과거처럼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5월 스페인에서도 정부 긴축재정에 반대하는 '분노하라(indignant)'라는 거대한 운동이 있었다. 말하자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의 문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원하는 기술은 무엇인지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요즘 당신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공산주의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견해는 학문적 작업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명확히 하자. 나에게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대안이나 해결책이 아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우리가 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자연에 대해, 어떤 국가가 좋고 나쁜지에 대해, 누가 지적 재산권을 관리하고 있는가에 대해, 갈수록 사유화되는 공통의 지식에 대해 말이다. 공통적인 것의 문제, 달리 말하자면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는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토대에 대해 공산주의 관점으로 심사숙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단순한 반(反)자본주의자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은 체제다. 과거 40~50년 동안 한국이 이루어온 것을 봐라. 중국도 마찬가지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나에게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3월 중국 전인대가 열렸을 때, 온 세계의 관심이 중국의 결정에 쏠렸다. 중국이 세계강국으로 부상하기 위해 국방예산을 2배로 올릴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는가? 중국은 오히려 내수확대를 위한 예산을 2배 증액했다. 재정정책 같은 경제문제 해결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역설이다. 생산력은 증가하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 등) 위험도 높아진다. 이런 위험은 서서히 증가할 것이다. 물론 한국이나 터키처럼 직접적으로 위기에 노출되지 않은(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도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지 않은) 운 좋은 국가들도 있다. 라틴아메리카 몇 개국도 그렇다. 그러나 이런 국가들은 예외다. 나는 우리가 위기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턱대고 무엇인가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 뒤로 물러나서 이 상황을 주시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에 대해 생각을 하라는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당신의 이론과 책들이 비판을 받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주지 않는다.

"아니다. 내 말은 언제 실현될지 모를 장기적인 해결책에 매달리지 말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말이다. 물론 월가 점령시위나 런던 폭동(지난해 8월 런던에서 시작된 청년들의 폭동이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벨기에 등지로도 번졌지만, 폭동을 주도한 주체도, 요구사항도 없어 이목을 끌었다)의 군중들이 해결책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시도들을 해야 한다. 금융자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은행규제를 요구해야 하고, 정의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물론 이런 과정이 위기 자체를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

이 위기가 점점 더 깊어지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탈산업자본주의 등으로 불리는 이 문명은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이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발전했다는 믿음이 있다. 한국을 보면 알 수 있다. 군사독재를 거쳤지만,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이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싱가포르나 중국의 경우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발전하지 않았다. 이 국가들의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는 매우 잘 돌아가고 있다. 이 사태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자유주의자가 말한 것과는 다른 '공산주의의 종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이겼다. 그런데 그 이겼다는 것이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 최고였던 공산주의자가 훌륭한 자본가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웃음) 이런 현실은 우리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래서 지금 발생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위기는 장기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최근 한국에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정치가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당신은 아랍혁명과 SNS의 관계에 대해 쓴 칼럼에서 SNS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하게 SNS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스마트폰이나 휴대용 디지털기기에 의존한 미디어는 시민사회를 위한 발언 기회를 더 확대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국가의 통제 바깥에서 집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권력의 시도가 있다. 구글, 위키피디아 검색제한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은 인터넷 사용을 감시ㆍ규제한다. 아랍 봉기가 일어났을 때, 정부는 인터넷과 휴대폰 연결을 끊어서 시위참여자들이 서로 통신을 못하게 해버렸다. 서구는 이런 사례를 야만적이라고 규정하며 우리는 절대 그렇지 않다, 민중은 자유를 원한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런던 폭동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도 마찬가지로 인터넷과 휴대폰 통신접속을 차단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누가 이 미디어들을 통제하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라. 컴퓨터는 점점 작아지고 데이터는 중앙으로 모이는 클라우드 시스템(소비자가 가진 모든 전자기기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연동 서비스)이 구축되고 있다. 아이팟이든, 노트북이든, 아이패드든, 모두 클라우드에 데이터를 저장한다. 누가 이 디지털 공공영역을 관리하고 통제하는가? 이것이 문제다. 중국이든, 아랍이든, 서구든, 모두가 이 정보를 지배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주장이 SNS에 대해 전적으로 회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내 주장은 이 새로운 미디어의 속성이 양가(兩價)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당신이 이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빅브라더'를 상정하는 것 같지도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강박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런 통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달리 말하면, 빅브라더가 아니고 다양한 브라더들, 똑똑하거나 뚱뚱하거나, 또는 멍청한 많은 브라더들이 통제하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 한 명의 빅브라더 또는 그 아들이 통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 보기와 달리 제대로 그 통제가 먹혀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강력한 정보기관이 배후에서 민심을 조종한다거나, 국가권력이 주도면밀하게 모든 것을 계획한다는 것은 강박적 상상이라는 말이다. 권력 작동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어 2008년 금융위기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쉽게 하나의 국가를 상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파워엘리트들이 있었지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공화당과 민주당이 서로 논쟁을 벌였는데, 거기에 등장한 정치인들의 모습은 정말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파워엘리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배후에서 일을 처리하는 비밀스러운 권력이 멋있게 보이긴 한다.(웃음)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위기가 왔지만 이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당사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요즘 같은 시절에 철학자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철학자는 대답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다. 환경위기나 경제위기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 섣불리 문제를 제시하고 대답을 구하는 것은 철학자의 본분이 아니다."

-당신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다. 알고 있나?

"한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나는 한국 독자의 관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자 한다. 나는 경제 발전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몇 해 전 방문했을 때 느낀 것이지만, 활력 넘치는 지적인 환경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한국인을 존경한다."

-한국에서 당신의 영향력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당신 책에서 영감을 얻는다.

"아마 그런 영향력은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오해는 최초의 이해보다도 더욱 지적인 것이다. 원조 철학자보다 더 훌륭한 지적인 성취가 오해에서 오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모두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외국인이 되어야 한다. 나는 사도 바울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의 제자 12명에 속하지 않지만, 가장 훌륭하게 기독교를 발전시켰다. 심지어 그는 예수를 본 적도 없다. 내 책을 한국인들이 읽어준다는 점에 감사한다. 경제적 발전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지적인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유를 시작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2000년대 한국 사회를 풍미한 사상가 맨 앞줄에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가 지난해 <실천문학> 가을호에 기고한 '포스트 근대문학의 시대, 또는 연장선에 대하여'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국내에 출간된 지젝의 저서는 23권으로, 가라타니 고진(12권), 위르겐 하버마스(10권), 미셸 푸코(7권)를 압도한다.

1949년 옛 유고연방에서 태어난 지젝은 1972년 류블랴나대에서 철학 박사학위, 85년 파리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을 통해 이름을 알린 뒤 세계 철학ㆍ사상계에 파장을 일으켜 온 그는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 )해 이미 50여권을 출간한 그는 영화, SF소설 등 다양한 대중문화를 철학의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국내에서는 지젝의 저서가 특히 비평계에서 많이 읽힌다. '지젝거리다'는 조어가 있을 정도로 담론장에서 많이 회자된다"고 말했다. 지젝 연구자인 민승기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인문학계에서 지젝의 사유에 관심을 갖는 것은 가장 대중적인 대상에서 철학의 정수를 뽑아내고, 일상에서 철학적 사유를 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지젝의 이론ㆍ사상적 토대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관념철학,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지젝이 해석한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하나의 닫힌 체계를 완성하는 것의 정반대 편에 있다. 정(正)도 반(反)도 아닌, 하지만 동시에 정이면서 반인 합(合)을 지향하는 변증법이다(지젝에 따르면 영화 '에일리언' 속 에일리언이 사람도 괴물도 아니면서 동시에 사람과 괴물인 것처럼). 그는 새롭게 해석한 헤걸의 변증법을 일상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깨부수는 비판의 도구로 활용한다. 지젝의 라캉도 이렇게 해석된 라캉이다. 자기동일적 주체?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란 언제나 분열된 주체, 분열된 채로 자기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 주체다.

민승기 교수는 "지젝은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지금 상황을 뒤흔들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생산해내는 절차를 만들고자 한다. 현실적인 문제에 개입하면서 손쉬운 해결책이 주는 이데올로기적의 함정을 지적하고 '왜 이게 문제가 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학자"라고 말했다.

정리=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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