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 문제에서 자유로운 대학은 없다고 본다. 국립대야 정부가 예산을 대 줘 학교 운영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자급자족' 해야 하는 사립대는 등록금이 곧 혈관 격이다. 등록금 없이는 교직원 월급, 장학금 지급, 시설 확충, 교수 채용, 뭐 이런 모든 고등교육의 운영 행위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물론 현금과 부동산을 '빵빵하게' 보유한 재단을 갖고 있는 대학은 예외겠으나 이런 곳은 가뭄에 콩 나듯 희소하다.
등록금 시즌이 도래하면 대학들의 고민은 깊어지게 마련이고, 등록금을 일종의 물가안정 수단이라는 특이한 시각에서 접근하는 정부도 덩달아 마음이 분주해진다. 올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인상한다면 어느 수준이 적절한지, 총장의 생각은 온통 등록금에 가 있다. 등록금심의위원회를 가뿐히 넘어설 안을 내놓는 것 역시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매년 어김없이 등록금 인상 여부를 주시하고 있는 정부의 '무언의 압력'은 대학 입장에선 골칫거리다. 등록금을 책정해야 할 때가 되면 연례행사처럼 물가관련부처 회의를 열어 대학들을 압박한다. "대학 등록금도 물가 인상과 경제상황을 감안해야 한다"는 식의 회의 결론이 늘 뒤따른다.
정부와 대학의 등록금 줄다리기 승부는 적어도 지난해까진 백중세였다. 인상을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대학이 수용하는 모습이 확연했어도, 그렇다고 무턱대고 인하하거나 동결하는 '순진한' 대학들도 찾기 힘들었다. 등록금이 생명줄이라는 불변의 진실은 모든 대학들이 인지하고 있었던 까닭일 터다.
그런데, 올해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우리 사회를 휩쓴 '반값 등록금' 쓰나미에 편승한 정부가 대학을 상대로 흥정에 나선 것이다. 거래를 하려면 이에 걸맞는 상품이 있어야 하는 법. 교육부가 내민 카드는 1조7,500억원이라는 돈이다. 등록금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한(사실 여론에 밀린 감이 없지 않다) 정부가 대학에 지원하기 위해 어렵사리 마련한 예산이다. 7,500억원은 웬만큼 학점이 되는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주기로 결정됐다. 문제는 나머지 1조원이다. 이 돈 역시 대학생 머리 숫자대로 지원을 원하는 대학에 나눠 주기로 했으면 깔끔하게 정리됐을텐데, 아뿔싸 교육부는 그만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등록금 인하 같은 자구노력과 재정 지원을 연계하기로 한 것이다. 등록금을 많이 낮추거나 강력한 구조조정을 하는 대학은 정부 돈을 잔뜩 주고, 그렇지 않은 대학은 찾아 먹을 게 없다는 식의 발상이었다. 교육부 입장에서는 등록금 인하 승부수를 걸었던 셈이다. 등록금 인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을 등에 업고 앞뒤 안 가리고 밀어붙인 측면이 강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결과는 교육부의 완패. KO패까진 아니더라도 판정패로 막을 내려가는 분위기다. 서울의 주요 대학들이 내놓은 올해 등록금 인하율은 높아야 2%대 였다. 연간 등록금이 1,000만원 정도 되는 대학은 고작 20만원만 낮추겠다는 의미다. 사실상 동결이거나, 생색만 내는 수준이다. 5%대 인하를 목표로 이미 책정된 등록금 지원 예산을 갖고 일종의 '꼼수'를 부린 교육부의 당연한 패착으로 귀결지어지는 모양새다.
1조원을 거머쥔 교육부가 대학을 감동시키기는커녕 외면을 받고, 망신을 당한 이유는 명료하다. 등록금 인하 문제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기인한다.등록금 인하와 재정 지원을 패키지로 설정한 것 자체가 안이했다. 대학 입장에서 실질 등록금 1%를 낮추는 것은 거대한 모험이다. 연간 등록금 수입이 수백억원이 넘는 대학이 등록금을 적게 낮추는 것이 정부 돈을 받는 것 보다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정부가 간파했다면, 이런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요 대학들은 교육부의 전략을 일찌감치 꿰뚫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학을 제대로 요리해 정부 바람대로 꽤 높은 비율의 등록금 인하를 끌어낼 요량이었다면 좀 더 치밀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조건 없이 재정 지원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등록금을 낮추지 않는다면? "정부 돈 받고 등록금 떨어뜨리지 않는 건 범죄"라는 국민들의 비판을 견뎌낼 대학이 있을까.
김진각 여론독자부장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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