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스러움(truthiness). 2005년 미국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어는 자신이 진행하는 심야 프로그램에서 처음 이 말을 쓰면서'무언가를 사실이라는 증거 없이도 진실이라고 느끼는 특성'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의 저자인 언론학자 파하드 만주는 "논리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그냥 맞는 것 같기 때문에 믿기로 하면 진실이 된다"는 것이다. 머리(이성)가 아닌 마음(감정)을 따른다는 것이다. 거짓이나 음모라도 상관없다.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 케리에 치명상을 입힌 진실을 위한 참전용사들의 캠페인, 9.11테러 음모론 같은 먼 곳의 사례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도 광우병 파동, 천안함 피격,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의 1억원 피부숍 이용설 등 얼마든지 있다.
'진실스러움'에 빠진 사람들은 원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객관적 '사실'인 현장, 경찰의 수사결과, 영화 에서 보듯 재판의 판결까지도 자기 믿음에 맞춰 이해하고 해석하는'편향 동화'에 빠진다. 때론 본질을 외면한 엉뚱하고 조작된 정보로 판단을 내린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모든 대상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리 로스의 소박실재론)고 착각한다.
정보홍수가 이런 현상은 야기시켰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정보만을 선택해 보고 듣고 읽고 퍼뜨릴 수 있고, 서로 만나지 않고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얼마든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똘똘 뭉칠 수 있게 됐다. 정보가 오히려 시야를 더욱 좁게 만들고, 자기만의 믿음과 편향성을 키우게 만든 셈이다. 어느 한쪽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과 주장을 혼동하는 새로운 매체도, 자기 이익에 집착해 세상을 해석하는 기존 신문과 방송들도, 적대감에 사로잡힌 좌와 우 모두 하나의 대상을 두고 서로 다른 모습만 볼 뿐이다.
파하드 만주는"진실스러움은 곧 우리가 선택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단순히 현실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믿고 나머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신하기로 결심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집단의 결속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진실스러움의 위력도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설령 내가 제공하고, 내가 선택해 믿고 있는 진실스러움이 거짓과 조작으로 드러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아니면 말고. 나만 그렇게 말하고, 믿으면 된다. 양심과 표현의 자유다.
그러나 그 자유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번이라도'아니면 말고'식의 공격을 당해본 사람이면 안다.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가 되는 지를. 서울시장 후보였던 나경원 후보를 보라. 한번 고개를 쳐든 진실스러움이 이성보다는 사람들의 감성에 파고들어 '진실'인양 위력을 발휘했다. 아무리 같은 무기(언론)을 가지고 곧바로 몇 번을 반복해 반격을 해도 소용 없었다. 이미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판단해 버린 사람들에게 사실조차도 거꾸로 '구차한 변명'과 '거짓'으로 보였다. 그는 추락할 수 밖에 없었다.
나경원 사건은 너무나 간단했다. 오로지 말 뿐이었다. 말을 결코 진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진실스러움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마구 퍼졌다. 구체적 자료로 사실을 확인하는 언론보도의 기본조차 없었다. 아직도 그들은 그 말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전봉주 전 의원의 허위사실 유포도 마찬가지다. 명백한 거짓말임이 밝혀졌는데도 공공의 이익이란 논리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누굴 위한 이익이란 말인가.
진실스러움과 아니면 말고의 주장은 정의가 아니다. 단지 정의라고 위장하고, 우길 뿐이다. 사실도 아니다. 자기들끼리는 뭉치게 하는 수단이 될지는 몰라도, 사회공동체 전체의 화합과 신뢰에 방해만 될 뿐이다. 개인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고,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가는 거짓과 음해가 만들어지고 퍼지는 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새로운 미디어 탓만 할 일이 아니다. 더구나 두 번의 큰 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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