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오로지 한글과 알파벳만이 휴대전화에 문자판으로 존재한다.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랍어도 태국어도 모두 알파벳을 이용해서 자기네 나라말을 발음대로 친 후 그 알파벳을 자기네 나라말로 바꿔서 글자를 만들어간다. 아, 위대한 세종대왕이여.
그렇다면 알파벳 언어권이 아닌 나라 사람들이 한글을 통해 자기네 나라 말을 찾아들어가게 자판을 만들면 어떨까? 한글은 한 글자가 한가지 음절이기 때문에 영어보다도 표현이 정확하다. 이같은 장점이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활용된다면 영국이 산업혁명을, 프랑스가 프랑스혁명을 전세계에 선사한 것만큼이나 한국이 세계에 기여하는 것이 되겠다. 물론 우리나라로서는 한글의 활용도가 커져서 알파벳 문화권에 흡수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찌아찌아족처럼 글자가 없는 민족이 한글을 통해 표현법을 익히는 것만큼 외국인의 표현을 도우면서 고유문화도 살리는 상생이 이뤄지는 셈이다.
미국에서 측량노동자로 일했던 재미교포가 퇴직 후 이 일에 나섰다. 그는 우선 화면이 훨씬 크고 편리한 한글 '나이러' 자판과 영어 '헤나(HENA)'자판을 만들었고 궁극에는 한글로 외국어를 입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방안까지 고민하고 있다. 박찬룡(71•크로스다이얼 대표)씨를 만났다.
_나이러 자판이 뭐지요?
"현재 있는 휴대폰용 한글 자판 가운데 가장 편리한 것으로 입증된 천지인 자판(삼성식 자판)보다 더 간편하고 화면이 큰 스마트폰용 자판을 만들었어요. 활용빈도가 높은 자모를 중심에 배열해놓고 보니 가운데가 'ㄴ ㅏ ㅇ ㅣ ㄹ ㅓ'가 되어서 나이러 자판으로 이름붙였어요. 똑같은 곳을 두 번이나 세 번 쳐서 다른 자음을 만들어내는 천지인과 달리 나이러는 직타식이에요. 눈에 보이는대로 자음을 찍으면 됩니다. 천지인은 ㅇ과 ㅁ이 같은 칸이라 '양용은'을 치려고 하다보면 '야묘믄'이 되기 쉬운데 나이러에서는 자음이 아예 다른 칸에 있으니까 이런 실수를 할 일이 없지요. 모음은 두 번 찍게 되어있긴 한데 그래도 처음 쓰는 사람도 자판만 보고 즉시 쓸 수 있어서 속도가 빨라요. 제 친구들이 모두 41년생 노인인데 이걸 해보더니 정말 쉽고 편하다고 저한테 고맙다고 그래요."
_활용할 칸은 똑같을텐데 어떻게 이런 차이가 가능하지요?
"밀어쓰기를 활용해서 그래요. 가령 ㄲ은 천지인에서는 세 번 눌러야 나오는데 나이러에서는 ㄱ을 밀면 ㄲ이, ㄷ을 밀면 ㄸ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_헤나 자판도 같은 원리인가요?
"현재 스마트폰 영어 자판은 아이폰이 대세를 주도하면서 쿼티 자판을 쓰고 있어요. 쿼티 자판이란 컴퓨터용 자판을 그대로 스마트폰으로 옮긴 거예요. 왼쪽 위에 처음 등장하는 자모를 옮기면 QWERTY라서 쿼티 자판이라고 부르지요. 아이폰은 한글도 쿼티 자판이에요.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에 컴퓨터용 자판을 그대로 옮겨오니까 자판 하나가 깨알같이 작아져요. 그래서 문자를 칠 때면 스마트폰을 기울여서 쓰는데 그러면 글자내용이 보이는 칸이 좁아져서 전체 내용을 읽기 불편해요. 글자칸도 여전히 좁아서 손이 둔하면 실수가 잦고요. 이런 게 불편하니까 미국에서도 티나인(T9)같은 방식을 퀄컴이 만들어봤는데 널리 쓰이질 못하고 사라졌어요. 이건 연타식 자판처럼 한 칸에 석자를 넣되 한번만 쳐도 컴퓨터가 알아서 세 글자 중에 맞는 글자를 찾아서 단어를 조합해주거든요. 그런데 단어를 다 완성해야 맞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을성이 없어서 쓰질 못해요. 결국에는 빼곡한 쿼티 자판이 스마트폰까지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헤나 자판은 많이 쓰이는 자모를 중심에 배열하고 빈도수가 적은 글자는 주변으로 몰아서 스마트폰을 길이 그대로 써도 불편이 없어요. 다섯개 모음 사이에 자음인 N이 들어가서 가운데 줄을 따라 읽으니 헤나가 되었어요. N을 모음 사이에 배치한 것은, 중국에서는 en, an, ang, eng 같은 발음도 모두 모음이라 자주 쓰거든요. 알파벳을 활용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배려해서 만든 자판입니다. 또 영어에 자주 붙어서 나오는 문자는 옆에 배치해서 영어권 사람들한테도 쿼티 자판보다 훨씬 편리해요. 이런 걸 영어에서는 다이그래프(digraph)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단짝 문자라고 하는데 wh, th, sh, re 같은 걸 말하지요. 이게 바로 옆에 붙어 있으니 쿼티 자판보다 빨라요."
_원래 컴퓨터를 전공하셨나요?
"전혀 아닙니다. 고등학교(서울고)를 졸업하고 학비가 안 드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어요. 적성에 맞지 않아서 3학년 때 중퇴를 하고 1963년에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에 갔어요. 당시에는 사관학교 중퇴자에게도 군대를 면제해주어서 67년에 대학졸업을 하고는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주사로 들어갔어요. 사회 정교사, 영어 부교사 자격증은 있었지만 교사 적성이 아니라. 그때 통계국에는 키펀치로 움직이는 어마어마한 IBM 컴퓨터가 있었지만 별 관심은 없었어요. 68년 말에 캘리포니아 헤이워드에 있는 남가주 주립대로 통계를 전공하겠다고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아내가 간호사라서 영주권이 나오길래 영주권을 따고 저는 공부를 그만 두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자리잡고 닥치는대로 일을 했어요. 접시닦기부터 편의점 아르바이트, 교회잡부 등등. 오클런드시티의 알라미타카운티 병원에서 경리로도 일했는데 승진할 기회가 생기자 그 자리를, 제가 일을 가르친 제 후임인 흑인한테 주는 걸 보고는 토목측량일로 옮겼습니다. 80년부터 만 65세가 되는 2006년까지 이 일을 했습니다. 막노동이지만 영어를 잘 알아들어야 하기 때문에 외국인이 잘 못하는 일입니다. 연봉도 6만달러까지 받았으니 돈도 아주 많이 버는 일이에요."
_그럼 컴퓨터하고는 인연이 없을 듯한데 어떻게.
"퇴직하기 1년전부터 고국 생각이 나서 한글 자판을 익혔어요. 그런데 26개 자판을 익히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더 편리한 자판을 만들 수 없을까 독학을 했어요. 국립국어원에 들어가 현대국어 사용빈도도 조사하고 세벌식 타자기 원리도 보고. 이 세벌식 타자기 원리가 아주 훌륭하더군요. 받침을 따로 표시하게 되어 있어서 그것도 응용하고. 그래서 2005년부터 정보통신연구진흥원에 계속 지원과제 신청을 했어요. 그게 2007년에 선정이 되어서 6,400만원 지원을 받아 나이러 자판의 토대가 되는 '만능병음자판'을 만들었습니다."
_미국 시민권자 아닌가요?
"90년에 재혼을 했는데 아내가 한국인이라서 아내를 통해 사업자 등록을 하고 신청을 했습니다. 이게 매칭펀드 시스템이라 제 돈도 공식적으로는 3분의 1쯤 들어갔고 실제로는 거의 5억 정도를 이 자판 배열에 쏟아부었습니다. 문자 배열도 계속 바뀌어서 작년 말에야 나이러와 헤나 자판이 완성됐어요."
_밀어서 자음이 바뀌는 시스템은 아무래도 아이폰 이후인 것 같네요.
"제가 2010년 8월에 아이패드를 쓰면서 밀어쓰기를 자판에 도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밀어서 쓰기 자체가 애플의 발명은 아니에요. 오래 전부터 활용되던 거예요. 삼성에서 사들인 모아키도 밀어쓰기를 활용했고요. 현재 한국에서 많이 쓰는, 같은 곳을 두 번 연타해서 다른 자음을 만드는 방식은 영어식 표준인 아스키 코드로 전환이 안되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국제로밍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고요. 그래서 연타 방식을 피하려고 하다보니까 밀어쓰기가 나왔고 밀어쓰기 자체는 아스키 코드에서 따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쉬프트키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바꾸어서 아스키 코드를 활용하는 것도 고민중입니다."
_이 자판은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 쓸 수 있습니까?
"안드로이드폰을 쓰는 사람은 유비누리에 가서 어플을 받을 수 있는데 아이폰으로는 안됩니다. 처음에는 아이폰용으로도 어플을 만들었는데 이메일용으로만 허용하고 문자용으로는 쓸 수 없게 만들어서 안드로이드폰용으로만 보급하고 있습니다. 애플은 아이폰을 통해 세계 문화를 미국 중심으로 제패하려고 합니다. 모든 게 영어 중심이고 스마트폰의 세계에서 영어와 대등하게 독립적인 문자문화권을 이루는 한글 자판을 없애지 못해 안달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역으로 이 상황을 활용해서 중국을 통해 헤나 자판을 널리 보급하고 나중에는 한글 자판 자체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활용해서 자기네 문자를 옮기는 방식으로 활용되게 하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워낙 아이폰을 많이 쓰기 때문에 탈옥을 해서 나이러와 헤나 자판을 활용하는 방식도 찾고 있습니다."
_좀더 설명을.
"가령 상하이를 중국인들이 현재는 shanghai를 쳐서 한자로 바꾸는데 '샹하이'라고 써서 바꾸게 하는 방식이지요. 알파벳의 v f th 발음을 한글에서 구현하기 위해 나이러 자판에 , ⌒같은 기호판을 만들었습니다. ㅂ 옆에 이런 표시가 들어가면 v가, ㅍ옆에 이 표시가 들어가면 f가 되게 말이지요. 일단 중국 시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바뀌면 미국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지린성의 중국조선신식학회(정보화학회) 회장인 현룡운 동북아정음연구소장과 함께 2009년부터 중국인에게 더 편리한 영어 자판을 보급하는 방식을 의논해왔고 N을 모음 사이에 쓰는 헤나 자판도 그렇게 탄생한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헤나 자판 보급이 우선이고 쿼티 자판보다 훨씬 편하다는 것을 중국인들이 실감하면 쓰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해요."
_자신 있으신가 봐요.
"제가 (서울) 성북구의 장애인 복지기관에 가서 나이러 자판을 시연했더니 즉시 장애인용 자판을 만들어달라고 하더군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깨알 같은 쿼티 자판이나 두 세 번 두드려서 다른 글자를 만드는 천지인 자판은 불편합니다. 스마트폰 이전에는 LG가 장애인용 피처폰을 만들었는데 스마트폰에서는 장애인용이 쿼티 자판만 있어서 불편해요. 나이러 자판을 활용해서 '애인'자판을 만들었습니다. 나이러 자판과 다른 점은 천지인처럼 모음을 한 줄로 모은 것입니다. 칸이 큼직하고 밀어쓰기로 되어 있어서 시각장애인에게 편리한데 아직 소리를 입히진 못했습니다. 이 부분은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_어플은 무료인가요?
"무료에요. 3월 이후에 모음에 색을 입혀서 내놓을 텐데 그때도 흑백인 현재 어플은 계속 무료로 보급할 생각입니다."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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