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여개에 달하는 소극장이 밀집해 있는 서울 대학로 연극의 거리에서 동숭동 1-18번지 정보소극장은 연극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다. 배우 겸 연출가 고 박광정씨가 운영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08년 말 이후 여행자 등 6개 극단이 공동으로 맡아 이끌며 상업 연극의 홍수 속 순수 연극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공간이다.
2일 정보소극장에서 개막한 '서울노트'는 관객 취향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채로 세상 읽기를 고집했던 연극인 고 박광정씨를 기리는 무대다. 일본의 한 미술관을 배경으로 한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의 '도쿄노트'를 번안한 연극은 고인이 만든 극단 파크의 대표 레퍼토리다. 이번 공연은 그의 아내인 최선영씨를 비롯해 최용민 권해효 민복기 박원상 등 24명의 배우와 연출가 성기웅씨가 '박광정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뭉쳐 만들었다.
연극은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작품 등 유럽 명화 특별전을 보러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시간적 배경은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가상의 한 시점. 명화는 전쟁을 피해 서울로 옮겨 온 것이다.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이 아닌 극사실주의 그림처럼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관객은 100분의 공연 시간 동안 주로 그림을 보러 온 극중 캐릭터의 생활적인 대화와 마주하게 된다. 각 인물의 대화가 동시다발로 진행되는 가운데 관객은 나의 이야기도 될 수 있는 타인의 삶의 단편을 객관적으로 지켜 보면서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고민할 기회를 갖는다.
대화가 남기는 메시지는 다양하다. 장녀(임유영)와 차남(신덕호), 차남의 처(최선영) 등 오랜만에 모인 일가족의 대화에서는 붕괴돼 가는 현대 가족의 의미가 읽히고, 남자1(최덕문 문경태)과 여대생1(송유현)의 대화는 현대인의 미숙한 소통 방식을 드러낸다. 상속녀(남승혜)와 상속녀 친구(마두영)의 이야기에는 평화와 반전의 가치까지 담았다.
히라타 오리자는 일본에서 자극적이고 요란한 연극 사조에 대한 반동으로 일상과 인간의 내면을 강조한 '조용한 연극' 경향을 선도한 인물로 유명하다. 자연히 이를 번안한 '서울노트'도 잔잔하게 전개되지만, 그 울림만은 극단적인 클라이맥스가 있는 연극 못지않게 크게 남는다. 최덕문 오용 민복기 등 내공 깊은 배우들이 작은 움직임으로 표현한 은근한 유머도 흥미롭다. 12일까지 쉬는 날 없이 공연된다. (02)762-0010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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