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 농구 코트를 지배했던 '매직 히포' 현주엽(36)이 지난 12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민사법정에 섰다. 원고 측 변호인석에 앉은 그는 힘 있게 농구장을 누볐을 현역 시절과 달리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과 귀는 모든 재판 과정에 집중하고 있었다. 농구인으로 살아온 30여 년의 대가를 다시 찾기 위한 자리였다.
달콤한 유혹
현주엽은 서장훈, 이상민, 전희철 등과 함께 1990년대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대학 재학 시절 고려대 농구부의 중흥기를 이끌며 '신촌 독수리'에 대항하는 '안암골 호랑이'의 대표주자로 꼽혔다. 1998년 신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SK에 지명돼 화려하게 프로에 입성했던 그는 파워 넘치는 플레이로 전성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2009년 훌쩍 코트를 떠났다. 무릎부상으로 더 이상 코트를 누빌 수 없는 상태였다.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우승 트로피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불운한 선수 생활의 마감이었다.
현주엽은 2008년 말 중ㆍ고교, 대학 동창이었던 아이스하키 선수 황모씨로부터 증권 파생상품 전문회사인 삼성선물 직원 이모씨를 소개받았다. 황씨와 이씨는 "선물에 투자하면 단기간에 많은 수익금을 지급해 줄 테니, 믿어봐라"고 권했다. 실제로 황씨는 이전부터 이씨를 통해 수억원을 투자하고 있었다.
2007년부터 자주 술자리를 가지며 친하게 지냈던 박모씨도 있었다. 박씨는 삼성선물 직원 이씨가 선물투자로 매달 수억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며 현주엽에게 적극적인 투자를 부추겼다. 삼성 계열사라는 믿음에다, 환리스크관리센터 과장이라는 이씨의 직위도 믿음직했다. 은퇴 후를 준비해야겠다는 마음도 한 켠에 있었다.
한 순간의 욕심으로 날린 농구 인생의 대가
결국 그는 투자를 결심했다. 2009년 3월 이씨에게 3억원을 보냈다. 당시에는 현역 선수였던 탓에 신분 노출 등을 우려해 친구 황씨 명의로 투자를 했다. 그 해 12월까지 11번에 걸쳐 보낸 돈은 24억원. 한 번에 5억원의 거금을 맡기기도 했다. 무릎이 부서지도록 뛰어다니며 벌어들인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수익이 괜찮았다. 수익금으로 받은 돈이 7억원에 달했다. 현주엽은 은퇴 직후 편한 마음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고수익에 대한 기대감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2010년 9월 이씨는 "자신이 받은 투자금은 실제로 선물투자에 사용된 게 아니었다. 다른 투자자들에 대한 수익과 원금을 위해 지급됐고, 지금 투자금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됐다"며 모든 걸 털어놨다.
실제로 현주엽이 투자한 돈 대부분은 그에게 투자를 적극 권했던 박씨의 지갑으로 들어갔다. 현주엽의 친구 황씨의 돈도 마찬가지였다. 이씨가 2001년부터 26억여원의 투자를 했던 박씨에 대한 수익금을 현주엽과 그의 친구 황씨의 돈으로 충당한 것이다. 일종의 '돌려막기' 사기였다. 현주엽에게 지급된 수익금도 사실은 다른 투자자의 투자금이었다. 계속된 선물 투자 손해로 더 이상 다른 투자자를 끌어들이지 못하자 고백을 한 것이다. 박씨는 현주엽 등의 돈으로 부산 해운대에 베트남 쌀국수 식당을 개업했고, 자신의 후배와 처 명의로 또 다른 식당과 카페를 열었다.
힘겨운 법정 공방
현주엽은 결국 이씨와 박씨를 형사 고소했다. 지난해 7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 한창훈)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피해자의 신뢰를 이용해 선물투자로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속이고, 지급받은 돈을 수익금으로 가장해 서로 주고 받는 방법으로 이를 은닉한 점은 죄질이 불량하다"며 이씨에게 징역 4년, 박씨에게 징역 3년6월을 선고했다.
이씨와 박씨를 철창에 보냈지만 현주엽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투자금 17억원이 그대로 허공에 날아갈 처지가 됐다. 결국 지난 3월 이씨가 근무했던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조정신청을 냈다. 현주엽은 신청서를 통해 "농구선수로 모은 전 재산을 날렸고, 은퇴 이후 돈을 벌기가 어렵다"며 "회사가 (투자자에 대한) 신뢰를 보호키 위해 사용자 책임을 인정할 것으로 믿어 소송이 아닌 조정을 신청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 현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연히 조정은 깨졌고 손해배상 소송으로 넘어갔다.
현재까지 양측의 법정 공방은 네 차례 이뤄졌다. 현주엽 측 변호인은 "이씨가 고객으로부터 임의로 돈을 유치 받아 투자한다는 사실을 회사측이 알고도 방치했다"며 "자체 감사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고도 형식적 징계에 그치는 등 직원에 대한 감독 의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씨가 평소 회사 감사 등의 이유로 더 이상 투자금 출금이 어려워 수익금 지급이 힘들게 됐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반면 회사 측은 "현씨는 회사와 계약한 게 아니라 이씨에게 개인적으로 투자한 것으로, 이씨의 행각은 개인 비리일 뿐"이라고 맞섰다.
둘 간의 공방은 곧 마무리될 예정이다. 3월에 예정된 속행 공판을 포함, 한 두 번의 재판을 연 후 변론을 종결하고 선고가 내려질 전망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통상 이런 류의 소송에서 회사의 책임을 묻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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