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장석주 지음/문예중앙 발행·175쪽·8,000원
장석주(56ㆍ사진) 시인의 15번째 시집은 수록시 55편 모두에 '주역시편'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2000년대 들어 동양사상의 본류 중 하나인 노자, 장자를 천착하며 이를 삶에 대한 통찰로 연결시키는 시 작업을 해온 시인은 내처 <주역> 으로 공부 영역을 넓혔다. 변화무쌍한 자연현상의 원리를 음양(陰陽)의 이원론으로 풀이한 이 고전까지 섭렵한 시인의 시는, <절벽> (2007) <몽해항로> (2010) 등 이전 시집의 문체를 이어가면서도 생의 숨은 뜻을 향해 한층 깊숙이 시추공을 뚫는다. 몽해항로> 절벽> 주역>
'나비에겐 골육이 없고/ 작약꽃에겐 위와 쓸개가 없다./ 골육과 위와 쓸개를 가진/ 나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비에겐 나비의 하루가 있고/ 모란꽃에겐 모란꽃의 근심이 있을 테다.'('가정식 백반_주역시편 1'에서) 고고한 자의식을 내려놓고 만물과 나란히 선 시인은 삶에 대한 통찰을 가로막는 좁은 사유의 틀도 깨부순다. '해가 뜨네. 금은(金銀)의 울음을 울며/ 살자 하네./ 해가 있으니 밥술이나 떠먹고/ 버드나무가 있으니 그 아래를 걸었지./ 살았으니까/ 살아졌겠지.' '해'와 '밥술'은 영 상관없어 보이고 '살아졌으니 살았다'고 해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기존의 인과적 사유를 뒤집고는, 시인은 거침없이 나아간다. '이미 얼면/ 얼지 않네./ 늦지 않으려면 늦어야 해./ 가지 않으려면 가야 해./ 오지 않으려면 와야 해./ 죽지 않으려면/ 죽어야 해.'('달 아래 버드나무 그림자_주역시편 98'에서)
이 전도(顚倒)된 사유는, 그러나 타당하다. 이미 언 것은 얼지 않고, 죽은 것은 다시 죽지 않으니까. 익숙지 않을 뿐, 생의 진실은 이토록 가까운 곳에 거꾸로, 누군가 뒤집어주길 바라며 옹송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