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선언/앙드레 브르통 지음·황현산 옮김/미메시스 발행·296쪽·1만8,000원
피카소, 자코메티, 달리, 엘뤼아르, 아라공 등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했던 문학ㆍ미술 거장들의 교유 관계를 살피다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앙드레 브르통(1896~1966). 독자에겐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매혹적인 여성과 교제했던 몇 달 간의 경험을 두서없고 몽환적으로 기술한 산문집 <나자> 의 작가로 기억되는 프랑스 태생의 시인이자, 평론가, 편집자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예사조인 초현실주의를 주창하고 일군의 작가 그룹을 주도, 당대에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나자>
브르통이 1924년 사실주의 문학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무의식을 중시하는 창작론을 제시한 '초현실주의 선언'(이하 '제1선언')은 그를 일약 새로운 미학의 리더로 자리매김했고,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모여든 젊은 작가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그룹의 내분, 비시정부(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면서 수립된 괴뢰정부)의 탄압에 의한 미국 망명 등의 시련을 겪으며 존재감이 약화되는 와중에 제2, 제3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세 건의 선언문과 브르통의 강연문, 잡지 기고를 묶고, 프랑스 시 분야의 권위자이자 빼어난 번역가인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우리말로 옮기고 해설한 책이 이번에 출간된 <초현실주의 선언> 이다. 초현실주의>
브르통이 세우고자 했던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뼈대를 보여주는 이 책에서 요체가 되는 글은 시기적으로도 가장 앞서는 제1선언이다. 선언문이라는 형식이 말해주듯, 정교하고 체계적인 설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래서 오히려 변혁을 향한 당시의 열정과 의지가 오롯이 묻어나는 이 글에서 브르통은 창작자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수동적인, 또는 가장 수용적인 상태에 자신을 가져다 놓으라"(95쪽)고 주문한다. 여기서 초현실주의 문학의 대표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자동기술법이 도출되는데, 이는 무의식 영역에서 자유롭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포착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묘사와 심리분석을 통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존 사실주의 문학과의 완전한 결별 선언인 셈이다. 브르통은 이어 "어떤 종류의 연상으로부터 바람직한 돌발성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좋다"(111쪽)면서, 신문에서 잘라낸 표제들을 아무렇게나 이어붙인 콜라주에 '시(詩)'라는 제목을 붙이는 도발을 감행한다.
'무의식'을 끌어들여 인간 존재의 확장을 꾀한 프로이트와, 세계의 변혁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의 사상의 수혜를 받은 브르통이 주창하고 이끌었던 초현실주의를, 황 교수는 "존재의 총체성을 문제 삼은 거의 유일한 운동"(48쪽)이라고 평가한다. 철 지난 듯한 20세기 문예사조의 본질을 짚는 이 날카로운 안목이 초현실주의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린다. 예컨대 '미래파'를 위시해 2000년대 한국문단에 대거 등장한 젊은 작가군의 반(反)리얼리즘 작풍의 저변에 깔린 정신은 90여 년 전 파리에서 사실주의의 아성에 맞섰던 초현실주의 그룹의 그것과 거리가 멀지 않아 보인다. 브르통의 선언문을 그의 개인사, 당대 파리 문화계의 사정과 연결 지어 47쪽에 걸쳐 자세히 다룬 황 교수의 해설은 그 자체로 이 책의 값어치를 톡톡히 해낸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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