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현상학, 풍경 그리고 건축/이종관 지음/성균관대학교 출판부 발행·512쪽·3만4,000원
각 시대의 학문, 문화, 예술은 어떤 공통된 경향을 갖는다. 예를 들어 절대 이성이 강조되던 근대에는 뉴턴의 물리학이 대세를 이루었고, 이는 공간의 절대성과 평면성을 근본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근대 이후 20세기 전반부까지 서양건축물들이 주로 완벽한 직선, 완전한 원 등 정형화된 도형을 구현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절대적 공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포스트모던 시대 과학계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된다. '세계가 근본적으로 휘어진 공간'(55쪽)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공간의 개념이 바뀌고, 자연스럽게 건축의 트렌드도 바뀐다. 1970년대, 기하학적 굴곡을 통해 공간을 파격적으로 해체시킨 프랭크 게리와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이 각광받은 것은 이런 시류가 반영된 것이다.
예술철학자 이종관씨는 이렇듯 건축을 통해 과학, 철학의 결합을 시도한다. 1부 '건축에서 현상학으로'에서는 근현대 물리학의 바이블인 뉴턴, 아인슈타인의 공간 개념을 철학사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비약이 너무 심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12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을 다 읽다 보면 나름의 타당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소 거칠게 요약하면 저자는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공간에 대한 사유를 뉴턴에, 후설의 개념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하이데거의 공간적 사유를 아인슈타인에 대입시킨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인식의 주관성을 견제한 후설의 개념이 뉴턴과 비슷하다면, 인식의 주체로서 존재를 강조한 하이데거는 아인슈타인과 비슷하다.
저자는 뉴턴보다는 아인슈타인, 후설보다는 하이데거의 관점을 옹호한다. 요컨대 건축은 특정 공간 안에 사람과 자연, 사물들이 어울리는 양식을 유념해야 하며 도시는 이런 건축물들의 총합이 이루는 풍경을 고려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2부 '현상학에서 건축으로'는 이 이론적 바탕으로 서양 건축의 역사를 살핀다. 각 시대를 관통한 가치관과 공간에 대한 개념, 건축 양식을 소상히 소개한다.
3부 '건축에서 미래로'는 이런 사변적 사유를 현재의 도시와 건축에 대입시킨 글이다. 저자는 현대 도시의 새로운 트렌드로 유시티(첨단 정보통신 인프라와 유비쿼터스 정보기술을 생활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도시)와 디자인 도시(도시를 장식적, 기호학적 공간으로 재해석해 변화 시키는 흐름)를 언급하며 두 트렌드의 첨단에 서울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 각국 대표 도시의 특장점을 잡탕식으로 끌어 모은 서울은 '정처 없이 떠도는 기표들의 놀이'(391쪽) 공간이다. 저자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추진하는 서울시의 디자인 서울행정을 '이곳 사람들이 살며 이루어놓은 거주의 공간이 아니라 각국의 모사물들이 전시되는 쇼케이스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아우라가 부재하는 도시는 로마나 프라하처럼 관광객을 지속적으로 불러들일 수 없다'고 충고한다. 자연과 사람과 건축이 어울리는 풍경으로 도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두툼한 분량과 난해한 제목으로 언뜻 손이 가지 않는 책이지만, 근현대 철학, 물리학의 개념을 친근한 건축물로 소개하고 있어 의외로 쉽게 읽힌다. 다양한 분야의 이론들을 통합해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저자의 창의적인 주장이나 제안이 없는 점은 아쉽다. 지적 호기심이 많은 독자들은 흥미를 가질 만한 책이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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