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서울대 철학과에서 한 외국인 교수의 정년 퇴임 기념 행사가 열렸다. '서울대의 소크라테스'로 불려온 마크 시더리츠(65ㆍ사진) 미국인 교수다. 백발의 노교수는 이날 모인 학생들에게 "자네들을 가르칠 기회를 가진 건 내게 큰 영광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 제자에 대한 그의 평가는 후했다. "제가 이곳 인문대 강의실에서 만났던 학생들은 미국이나 영국 최고의 학생들보다 대부분의 면에서 낫다고 확신합니다. 지적 호기심이 많고 두려움 없이 논쟁을 벌이죠. 수업 준비도 잘 해옵니다. 이런 학생들이라면 앞으로도 20년은 더 교류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시더리츠 교수가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임용된 건 2008년 9월. 이 학과 최초의 외국인 교수였다. 예일대 철학과에서 인도 불교철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미국 소노마대를 거쳐 일리노이 주립대에서만 28년을 재직했다. 조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불교철학 전공)는 2일 "그가 불교철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뒤 수 차례 제안을 받고도 다른 학교로 옮기지 않았다는 건 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라고 전했다.
그랬던 그가 서울대에 오게 된 데 대해 조 교수는 "불가(佛家)에서 쓰는 인연이란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여러 우연이 겹쳤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서구 현대 철학인 분석철학을 가르치던 홍창성 미네소타 주립대 교수가 한 학회에서 시더리츠 교수를 만난 게 인연의 시작이다. 홍 교수의 천거로 그는 2007년 서울대에서 일주일 동안 하루 4시간씩 세미나 강연을 했고, 그때 학생들의 호응도가 높아 임용으로 연결됐다는 게 조 교수의 얘기다. 물론 시더리츠 교수도 학생들에게 호감을 가졌음은 물론이다.
시더리츠 교수는 동양과 서양 철학 간의 소통을 꿈꿨다. 같은 학과 강진호 교수는 "그는 인도 불교철학의 통찰이 현대 형이상학에 접목될 수 있다고 봤다"며 "세계적으로도 문헌학 위주인 동양 고대 철학을 서구 현대 철학 논의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드물다"고 말했다. 그에게 소통은 평생의 화두였다. 그의 강의는 대화식이다. 학부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들이 토론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식이다. '소크라테스'라는 별명도 여기서 나왔다.
평소 시더리츠 교수는 철학자들도 서로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동ㆍ서양 철학을 각각 공부하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면서 연구한다면 자기 분야에서 찾을 수 없던 해답을 상대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더리츠 교수는 동료 교수들에게 철학의 주요 문제들을 우리가 함께 풀어보자고 자주 역설했다.
시더리츠 교수는 이미 국내를 떠난 상태다. 지난 1일 한국과 기약 없는 작별을 했다. 서울에 온 지 3년 6개월여 만이다. 강 교수는 "국립대 교수 정년이 65세여서 한참 활발히 활동할 때인데도 시간강사 외엔 임용할 방법이 없다"며 "어쨌든 그와 학문적 유대와 교류는 계속 이어가려 한다"고 말했다.
시더리츠 교수도 한국과의 인연을 믿는다. 그는 지난달 15일 발간된 서울대 인문대 소식지에서 "서울대 재직 기간이 길지 않았는데도 최소한 책 두 권은 더 쓸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당분간 집필에 바쁘겠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서울대를 다시 방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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