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서울 명동의 한 백화점. A의류브랜드 매장에서 판매되는 오렌지 모직코트에는 31만9,000원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 옆 B매장에서도 붉은 색 모직코트는 29만9,000원에 팔리고 있다.
하지만 같은 시각 바로 길 건너 명동거리 입구에 있는 H&M에선 비슷한 모직코트의 가격이 10만원대이다. 같은 건물의 자라(ZARA) 매장에서도 유사한 코트가격은 20만원대다.
원가 차이일 수도 있고, 디자인이나 품질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슷한 의류가 바로 이웃한 매장에서 훨씬 싼 가격에 팔리고 있으니, 소비자들의 발길은 당연히 이 쪽으로 향하고 있다. 더구나 H&M(스웨덴)과 자라(스페인)는 명품은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이름난 SPA(제조ㆍ유통일괄형 의류) 브랜드들이다.
유명 해외 SPA 브랜드가 쏟아져 들어오고 소비자들의 발길이 이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면서, 국내 옷값에도 마침내 거품이 빠지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SPA발 가격파괴'바람이 의류업계 전반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굴지의 대기업 계열 의류업체들이 올 봄 신상품부터 잇따라 가격을 인하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SPA의 공세에 대항하려면 가격을 내리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일시적으로 값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가격인하 바람은 LG패션의 남성복 '타운젠트'와 신세계인터내셔널이 인수해 새롭게 단장한 '톰보이' 등이 주도하고 있다. LG패션 타운젠트는 상시 30% 할인된 가격, 즉 기존보다 70% 정도 선에서 소비자가격을 책정해 판매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톰보이도 기존 가격보다 2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시중에 판매된다. 이에 따라 ▦타운젠트는 50만원대의 남성정장 가격이 20만~40만원대로 ▦톰보이는 30만원대 코트가 20만원대로 팔리게 된다.
LG패션 관계자는 "타운젠트가 백화점에 입점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거리 독립매점에서 판매하기 때문에 가격을 낮추는 게 가능했다"고 말했다. 백화점에 입점해선 입점 수수료와 인건비 등의 영향으로 도저히 가격을 내릴 수 없지만, 타운젠트는 독립매장 중심으로 판매되기 때문에 가격조절이 가능하고, 원자재 소싱이나 유통과정을 줄임으로써 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의류 가격거품의 상당부분이 백화점 수수료에서 비롯되는 것을 입증하는 대목"이라며 "이런 유통마진만 줄여도 시중 옷값은 20~30% 인하여력이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톰보이도 자가 공장에서 옷을 생산하고 유통 과정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원가를 절감하겠다고 밝혔다.
해외SPA브랜드의 약진은 옷값뿐 아니라 의류 업계 전반의 지각변동을 낳고 있다. 올해 20주년이 된 캐주얼브랜드 '메이폴'은 최근 한국형SPA브랜드로 변신했고, 국내 최대 의류업체로 최고급 브랜드를 대거 보유하고 있는 제일모직조차 이달 말 SPA브랜드 '에잇세컨즈'를 정식 출시한다. 두 브랜드 모두 아예 SPA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메이폴 관계자는 "경쟁 SPA브랜드와 비슷하거나 더 낮은 수준으로 가격을 책정할 방침"이라며 "대중 의류시장 전반에 엄청난 변화바람이 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강은영기자 kis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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