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하다가 '치유 카페'를 발견했다. 음료를 팔면서 심리상담을 해주며 멘토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는 금연을 실천하는 데에 혼자로는 힘이 부족해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한 친구는 쇼핑을 너무 좋아해 과소비를 하고 있는데,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어떨까 하는 농담을 건넸다. 그 친구는 병원에 가는 걸 죽어라 싫어하는 나와는 달리, 작은 질병에도 병원을 '즐겨' 찾아가는 좋은 습관이 있었기에, 우선 병원을 끊으면 소비가 훨씬 줄 거라며 농담을 받아주었다.
최근 호되게 아픈 적이 있어서 병원 신세를 졌는데, 그럴 때는 병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나 같은 삐딱한 사람도 퇴원을 하면서 저절로 의사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정말로 아픈 사람들, 아프면서 돈이 없는 사람들에겐 병원 문턱이 여간 높아진 게 아니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항목의 검사를 의사가 권해서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인터넷 언론 사이트에 접속해 신문기사를 읽을 때면, 병원 광고가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날마다 현관문 앞에 공해처럼 붙어있는 동네 음식점 전단지처럼, 병원 광고의 홍수가 공해처럼 느껴진다.
웬만한 사람들의 식탁 한구석엔 갖은 영양제가 수북하고, 하루치 영양제를 손바닥 가득 담으며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병원광고가 많은 만큼 질병에 관련된 보험광고도 홍수다. 우리의 건강마저 자본의 폭력에 희생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몸의 건강은 둘째 치고, 마음의 병을 치유하겠다는 장소가 너무 많다. 한 블럭에 하나 정도는 '무슨무슨 치유'를 내건 간판을 볼 수가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다 보니, '치유하는 글쓰기' 같은 시민강좌가 눈에 들어온다. 미술 치유, 놀이 치유, 음악 치유 등등. 그만큼 상처받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일까. 급기야 상처마저 소비하는 시대라는 뜻일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은 무엇일까. 웬만한 상처는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강건한 심성을 갖는 일이다. 상처를 받아서 몹시 괴롭다면, 건강하다는 증거일 거다. 겪어야 할 눈물과 신음을 겪는 건 건강한 사람의 정상적인 과정이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심성은 강건해진다.
'치유'와 더불어 '멘토'가 유행하는 아이템이 됐다. 멘토를 자칭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멘토를 쫓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혼자서 삶의 지혜를 구하려다 부딪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다시 부딪치는 과정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도 된다. 괴테는 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라고 했다. 삶에 대한 노력과 그에 따른 방황은 비례할 것이다. 방황을 줄이려는 노력은 노력을 덜 하겠다는 노력일 수 있다. 멘토들과 멘토를 찾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면, 한 사람 몫으로 남겨진 방황과 상처가 실은 그 자체로 매우 숭고한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숭고한 경험을 요약하듯 건너뛸 때에 더 연약한 사람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쉬운 위로는 가짜 위로일 수 있다. 우리가 받은 고통은 그만한 신음과 눈물로 치르는 게 옳다.
세상은 날로 험해지고 사람은 날로 연약해진다. 생을 좌지우지할 커다란 충격이 아닌 경우라면, 일상 속에서 우리가 필시 겪는 우울과 슬픔과 외로움의 경우라면 좀 다르게 받아들이자. 우울과 슬픔과 외로움은 내쫓아야 적신호가 아니라, 내가 내 삶을 깨어있는 채로 느끼고 있다는 청신호라고. 세상이 폭력적이고 병들었고 혼란스러운데 내가 온전할 리 없다. 병든 세상을 살면서 신음소리가 나는 내 삶이야말로 병이 들지 않았다는 건강한 신호다. 그러니 애써 치유하려고 노력하지 말자. 치유될 리 없다. 우울과 슬픔과 외로움을 똑바로 쳐다보자. 쉽게 깨달음을 주고 낯익은 감동을 선물하는 따뜻한 책보다는 무섭고 불편한 우리 현실을 똑바로 그려낸 불편한 책을 우선 읽자. 세상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위선보다 세상이 막장이라고 이야기하는 위악에 우선 동참하자. 대부분의 고전들이 그 세계를 보여준 것 아닌가.
김소연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